총수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한 대기업 전용기의 세계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7.11 10:05
  • 호수 176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원·정의선·구광모·김동관 등 전용기 타고 글로벌 행보 박차
수백억~수천억대 구매·유지비 부담되지만 활용도 높아

전용기(專用機)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사람만이 이용하는 비행기’다. 여객기와 헬기를 포괄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자를 전용기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겐 각국 정상이나 세계적인 갑부, 월드스타 등이 전용 여객기를 이용하는 특정한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최근 2조 달러로 추정되는 재력을 갖춘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도 전용 여객기를 타고 방한했다. 그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진 한국 재벌그룹 오너들이 잔뜩 경직된 채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사진에 담겨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티타임 현장에 있던 오너들 가운데 전용 여객기를 이용하는 사람이 3명(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나 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국내 주요 그룹 중 전용 여객기를 보유한 곳은 SK, 현대차, 한화에 LG까지 총 4곳이다. 

이 중 전용 여객기를 제일 많이 보유한 그룹은 SK다. SK는 에어버스 A319(17인승)를 비롯해 걸프스트림 G650ER(13인승), 걸프스트림 G550(12인승) 등 3대를 운영한다. A319와 G650ER이 주력 기종이다. 최태원 회장과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 등 오너 일가가 주로 이용하며, 때때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전용 여객기 편으로 해외 현장을 누빈다. 

2018년 9월18일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탑승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왼쪽)과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최 회장 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최태원 SK 회장, 전용기 3대 이용 

SK의 해외 사업 확대에 더해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한국 재계 대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전용 여객기는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최 회장은 지난해 4월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어 지난해 6월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부회장급으로 구성된 WE(World Expo)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고, 부회장단과 계열사 CEO들이 해외 각 거점을 돌며 유치활동을 펴고 있다. 

올해 들어 최 회장은 전용 여객기를 타고 1월 미국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23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했고, 2월말∼3월초에는 윤석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로 날아가 각국 총리를 만났다. 6월엔 윤 대통령의 프랑스와 베트남 방문길을 뒤따랐다. 이렇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광폭 행보는 전용 여객기가 없었다면 소화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재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일반 여객기가 정기 노선을 정해진 시간에 이동하는 ‘고속버스’라면 전용 여객기는 ‘자가용 승용차’라 할 수 있다. 공항이 있는 곳은 세계 어디든 원하는 시간에 갈 수 있다는 게 전용 여객기의 특장점이다. 항공사들이 운영하는 정기선이나 부정기선과 달리 운항허가 등 가동 절차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점찍은 곳으로 출발하면 된다. 직항편이 없는 지역을 간다고 해도 환승할 필요가 없다. 별도의 전용기 터미널을 이용해 간편히 받을 수 있는 출입국 수속은 덤이다. 시간 관리와 보안이 생명인 총수들에게 전용 여객기는 그야말로 훌륭한 날개가 되어주는 셈이다. 

6월초 테니스를 치다가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은 최 회장이 해외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한 일등 공신도 전용 여객기다. 최 회장이 부산엑스포 홍보 패드를 부착한 목발을 짚은 채 부산엑스포 로고가 새겨진 전용 여객기에 올라타는 모습은 전용기의 존재 이유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최 회장은 SK의 전용 여객기 중 가장 규모가 큰 A319 동체에 부산엑스포를 홍보하는 대형 문구를 도색했다. 부산엑스포 로고와 함께 ‘World EXPO 2030 BUSAN, KOREA’ 영문이 새겨졌다. 

재벌 총수들의 전용 여객기로 많이 사용되는 걸프스트림 G650ER 모습 ⓒ걸프스트림 홈페이지

추가 도입 결정한 정의선 현대차 회장 

최 회장 못지않게 전용 여객기를 자주 이용하는 총수로는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꼽힌다. 정의선 회장은 올 1월 아랍에미리트(UAE)부터 6월 베트남까지 9차례 외국을 찾았다. 현대차는 현재 보잉비즈니스제트(BBJ) 737-700(20인승) 1대를 전용 여객기로 두고 있다. 전용 여객기 이용 수요가 늘어나면서 추가 도입도 계획 중이다. 신규로 구매할 전용 여객기 기종은 SK도 보유한 걸프스트림 G650ER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차의 전용 여객기 활용은 정 회장의 아버지인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룹을 경영할 때부터 활발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BBJ 737-700을 수시로 이용하며 해외 사업의 기틀을 다졌다. 10년 전인 2013년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차 공장과 슬로바키아 질리나 기아차 공장, 체코 노소비체 현대차 공장,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대·기아차 유럽판매법인과 유럽기술연구소 등 유럽 4개국의 해외 사업장을 3박5일 만에 다 돌아봐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반 여객기를 이용했을 경우 최소 8~9일은 필요한 일정이었다. 

한화는 2010년 4개 그룹 중 맨 마지막으로 전용 여객기를 구매했다. 각 계열사가 추진하는 글로벌 사업을 그룹 차원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다. 이때 도입한 BBJ 737-700을 아직도 이용하고 있다. 한화 측은 당시 “김승연 회장뿐 아니라 각 계열사 CEO들도 해외출장 때 전용 여객기를 타게 될 것”이라며 “CEO들이 귀중한 시간을 절약하고, 장기적으로는 출장 비용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김 회장의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그룹 경영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되면서 전용 여객기의 주 이용자도 바뀌었다. 1983년생으로 국내 10대 그룹 리더 중 최연소인 김 부회장은 주요 총수들의 단체 해외순방에 ‘필참’하는 한편 개별적인 해외출장도 적극적으로 잡고 있다. 

걸프스트림 G650ER의 내부 ⓒ걸프스트림 홈페이지

LG는 2008년 5월 걸프스트림 G550을 도입했다가 2016년 G650ER로 교체해 운영 중이다. 고(故) 구본무 선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2018년 6월부터 LG 경영을 총괄하는 구광모 회장 역시 전용 여객기를 십분 활용하는 모습이다. 6월29일 취임 5주년을 맞은 구광모 회장은 그동안 ‘글로벌 기업’ LG의 수장으로서 활발히 해외 현장을 챙겼다. 조용하고 실용을 추구하는 스타일상 다른 총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정이 많진 않았으나, 전용 여객기를 이용해 ‘정중동(靜中動)’식 해외 현장경영을 펼쳐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재계 1위 삼성은 전용 여객기를 운영하지 않는다. 대신 대한항공이 지난해 신규 도입한 BBJ 787-8을 포함한 전세기 2~3종을 번갈아 이용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 등 삼성 경영자들은 출장 기간이 길고 방문지가 여러 곳일 때 전세기를 대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일반 여객기를 타기도 한다. 삼성은 선대 이건희 회장 시절에는 보잉 737-700 2대, 봄바르디에 BD-700 1대 등 전용 여객기 3대를 운영했다.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그룹 경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게 된 이재용 회장(당시 부회장)이 이듬해 대한항공에 3대를 모두 매각했다. 이 회장의 ‘실용주의’ 경영 방침에 따른 조치였다. 

삼성은 전세기, 롯데는 일반기 이용 

실제로 전용 여객기는 삼성에도 부담이 될 만큼 구매비와 유지비가 많이 든다. 기종마다 차이가 있지만, 구매 가격이 보통 수백억원에서 1000억원대 수준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전용 여객기를 10년간 이용하려면 구매비만큼의 운영비가 든다. 우선 서울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 기준 격납고 이용료가 하루 200만~350만원씩 나간다. 전용 여객기가 이·착륙할 때마다 별도의 비용도 내야 한다. 각종 세금과 정비비, 인건비까지 더하면 전용기 운영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전용기 한 대당 고용해야 하는 인원은 운항·객실 승무원과 정비사 등을 포함해 20여 명에 달한다. 이희철 창신대 항공정비기계공학과 교수는 “여객기가 이륙하기 전이나 착륙한 후 상태를 관리하는 일상 정비는 전용 정비사를 고용해 해결할 수 있으나, 복잡하고 중대한 중정비는 항공사에 위탁할 수밖에 없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며 “전용 정비사 등 뽑아놓은 인력도 투입되는 인건비 대비 활용도가 떨어지니, 상대적으로 전세기 대여가 전용기 운영보다 실용적인 방안으로 평가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다만 이 교수는 “(SK, 현대차 등처럼) 전용 여객기 운영을 확대하는 기업도 있는 만큼 결국 오너의 성향과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롯데는 오너가 있는 5대 그룹 중 유일하게 전용기는 물론 전세기조차 이용하지 않는다. 신동빈 회장은 주요 해외 사업장을 찾을 때마다 일반 여객기에 탑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 관계자는 “롯데의 해외 사업장은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 근거리에 몰려 있기에 (비행 경로·시간 단축에 특화된) 전용·전세 여객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서 “신동빈 회장과 주요 CEO들이 가끔 미국이나 유럽 출장을 갈 때도 일반 여객기의 노선이 워낙 촘촘히 잘 짜여 있어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고 설명했다. 

 

■ 대기업 전용기, 쌍용이 최초로 도입 

한국에서 ‘대기업 전용기’라는 개념은 30여 년 전 쌍용그룹을 통해 도입됐다. 김석원 전 쌍용 회장이 1991년 봄바르디에가 제조한 챌린저를 도입했다. 당시 쌍용 회장과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를 겸임했던 김 전 회장은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를 앞두고 해외 일정 소화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용 여객기 구매를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 ‘세계 경영’을 천명했던 고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도 챌린저를 사들였다. 김 창업주는 하루 중 아시아 8개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만큼 전용 여객기 활용에 특화된 총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쌍용과 대우 두 그룹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해체됐고, 전용기도 매각 절차를 밟았다. 

1995년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은 걸프스트림 G-4를 들여와 전용기로 이용했다. 한진은 2007년부터 G-4를 임대용 비즈니스 전용기로 활용하다가 매각했다. 이 여객기는 인기 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주인공 구준표(배우 이민호 분)의 전용기로 등장하기도 했다. 

삼성그룹은 2000년 봄바르디에 글로벌익스프레스를 첫 전용 여객기로 들여왔다. LG그룹과 SK그룹이 각각 2008년과 2009년 걸프스트림 G550을, 현대차그룹이 2009년 BBJ 737-700을, 한화그룹은 2010년 BBJ 737-700을 줄줄이 도입하며 재계의 전용기 시대가 활짝 열렸다.

 

[관련 기사] 
이재용과 블랙핑크는 왜 ‘전세기’를 탈까
http://www.sisajournal.com/news/userWriterArticleView.html?idxno=267321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