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스만 눈치만 보는 대한축구협회, 갑과 을이 바뀌었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9.02 11:05
  • 호수 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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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5개월간 단 67일만 국내 근무
통제 불능 행보에도 협회는 “일단 믿고 지켜보겠다” 말만

지난 3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하 A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자 기대와 우려가 팽팽히 맞섰다. 역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지도자의 선임으로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의 기세를 차기 월드컵으로 이어갈 수 있고, 유럽 축구계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이 한국 선수들에게 한층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반면 과거 독일과 미국 A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할 당시 불성실한 자세로 적잖은 비판을 받은 점은 우려이자 불안 요소였다. 축구 외적인 이슈가 많았다. 현역 선수 은퇴 후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거주 중인 클린스만 감독은 독일 A대표팀 감독 시절 수시로 자리를 비우고 미국 자택에 머물러 질타를 받았다. 2020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헤르타 베를린 감독을 맡았는데, 구단·팬들과의 갈등 속에 미국으로 떠나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사퇴를 일방적으로 통보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3년 동안 감독 경력은 단절됐고 해설위원과 FIFA 기술연구위원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클린스만 감독이 6월20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 축구대표팀과 엘살바도로의 평가전을 지켜보고 있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약체로 평가되던 엘살바도르와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코치진과 함께 고양시에 상주했던 벤투 전 감독과 대비돼

취임 5개월이 지난 시점에 우려는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클린스만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 당시 “대표팀 감독이니까 당연히 한국에 거주할 것이다”며 자신의 근무 태도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켰다. 그러나 취임 후 170일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 그가 국내에서 근무한 기간은 67일이다. 국내 상주를 조건으로 달았다는 대한축구협회의 설명과는 정반대 행보다. 그나마도 3월과 6월 A매치 소화를 위해 A대표팀과 함께한 기간을 제외하면 실질적 국내 거주는 한 달 남짓이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등 유럽파에 대한 관찰과 면담을 명목으로 유럽으로 향했던 4월의 공백기는 그나마 명분이 있다. 자택이 있는 미국행이 논란의 중심이다. 5월부터 6월초까지 3주간은 미국에서 원격 업무를 했다. 6월 A매치 일정을 마치고 또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7월말 입국해 일주일간 국내에 머무르다 다시 출국했는데, 이때 축구협회는 “본인 생일을 맞아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유럽으로 출장을 갈 것이다”고 설명했다.

국내 여론의 의구심이 거세지자 8월 중순 국내 매체들과 원격 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인 줌(Zoom)을 이용해 간담회를 갖고 여러 쟁점에 대해 답했다. 미국 자택에서 화상 인터뷰를 가진 클린스만 감독은 원격 업무에 대해 “일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답했고, 자신을 ‘워커홀릭’으로 표현하며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을 관찰하고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변호했다.

잦은 외유가 한국 축구를 위해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는 설명엔 어폐가 있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현재 FIFA 기술분석위원과 UEFA 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다. 유럽행에 대한민국 축구와 실질적 관계가 없는 UEFA 기술위원회, 챔피언스리그 조추첨 참석 일정이 들어있다. 미국 스포츠 전문채널인 ESPN에 정기적으로 패널로 출연하는데 손흥민, 김민재보다 미국에서 뛰는 리오넬 메시, 바이에른 뮌헨과 토트넘이라는 공통 코드가 있는 해리 케인에 대한 코멘트가 더 많다.

선수 선발의 기준이 불명확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유럽파 이외의 선수들을 새롭게 발굴하는 것에 취약하다는 지적에는 동문서답했다. 그는 “30명 안팎의 선수를 보고 있다”고 말했는데 현재 대표팀이 25명 선발 형태를 취하는데 그의 선수 관찰 폭이 좁다는 것만 확인시켜줬다.

품이 많이 드는 새 얼굴 찾기는 국내에 상주하는 마이클김(김영민) 코치와 차두리 어드바이저에게 맡긴 셈이다. 국내 선수 관찰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와이스카우트로 챙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와이스카우트는 이탈리아 업체가 개발한 경기, 선수 영상 제공 플랫폼이다. 스카우트, 에이전트, 방송 관계자들이 많이 신뢰하고 활용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제공하는 영상 정보가 단편적일 수 있기 때문에 선수에 대한 인사이트를 갖기는 어렵다.

이런 업무 방식의 한계는 이미 지난 6월 A매치에서 드러났다. 당시 측면 수비 자원인 안현범을 선발하면서 “그의 경기는 직접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현범은 첫 경기였던 페루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자신의 공격적인 장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클린스만호가 요구하는 큰 틀의 역할에만 치중했다. 선수의 특징과 장단점에 대한 이해 없이 틀에 끼워 맞추기만 한 것이다.

전임 파울루 벤투 감독의 근태와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벤투 감독은 4명의 코치를 대동하면서 사단 전체가 주요 근무지인 파주NFC에서 가까운 경기도 고양시에 상주했다. 여름과 겨울 정기 휴가를 제외하면 90%가량 국내에서 업무를 봤다. 그 결과 포지션마다 6~7명의 선수를 후보군으로 70명의 리스트를 두고 여러 변수에 대비할 수 있었다.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으로서 벤투 감독을 선임한 김판곤 현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은 “벤투 감독뿐만 아니라 그의 코치들까지 일에 대한 열정, 전문성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상 프리랜서에 가까운 업무 방식

클린스만호의 9월 유럽 원정 A매치에 대비한 명단 발표도 보도자료 한 장으로 마무리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사실상 프리랜서에 가까운 업무 방식을 취하고 있다. A대표팀 업무를 중심에 두고 다른 업무에 관여하거나 미디어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 A대표팀은 그가 맡은 여러 일 중 하나라는 인상을 준다. 설상가상으로 함께하고 있는 코치들도 거의 국내 상주를 하지 않는다. 헤어초크 수석코치 역시 유럽 현지에서 해설가로서 투잡을 뛰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스스로 화를 불렀다. 계약서상에 클린스만 감독이 대표팀을 비롯해 한국 축구 관련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는 세부 조항이 없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국내 거주 발언도 초기의 의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매너 차원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감독을 통제하고 평가할 컨트롤타워의 힘이 전무하다 보니 클린스만 감독의 전횡에 가까운 업무가 통제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주도의 원맨 리더십이 부른 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클린스만 감독 선임은 전력강회원회의 감독 선임 시스템이 아닌 정 회장 개인의 의중이 깊게 관여했다. 벤투 감독과의 재계약 실패 후 A대표팀 신임 감독 선임에 돌입했지만 마이클 뮐러 위원장이 진행하던 기존의 프로세스는 2월 중순 전격 중단됐다. 이전부터 클린스만 감독과 친분을 맺고 교감해온 정 회장이 직접 선임을 진행했다. 감독 선임에는 여러 기준을 놓고 다면적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름값에 따른 선호가 작용한 것이다.

결국 지금 클린스만 감독의 전횡을 막을 축구협회 내부 인사는 정 회장이 유일하다. 클린스만 감독은 최근까지도 이강인을 비롯해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선수들의 차출 문제를 놓고 황선홍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겪었다. 실무 라인에서 도저히 중재되지 않던 이 문제는 이강인이 부상 여파로 A매치 기간에 A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상황 탓에 겨우 정리됐다.

20억원가량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클린스만 감독은 엄연히 대한축구협회의 고용인이다. 그런데 현재 그림은 고용주가 고용인이 하고 싶은 대로 끌려가고 있다. A대표팀 감독은 한국 축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막중한 자리지만 클린스만 감독의 ‘워크 에식’은 처참하다. 축구협회는 “일단 감독을 믿고 지켜보겠다”는 말만 반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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