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몬스터’에서 ‘피칭 마스터’로 화려하게 변신한 류현진
  • 김형준 SPOTV 메이저리그 해설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2 12:0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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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부상 복귀 후 구속 저하에도 칼날 제구 커브로 타자들 현혹
토론토가 디비전 시리즈 진출하면 가을야구 등판도 가능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뛰고 있는 투수의 26%는 토미존 수술(Tommy John surgery)로 불리는 팔꿈치 인대 접합술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투수는 공을 던질 때 팔꿈치 안쪽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가해지는데, 근육을 강화하는 훈련은 있어도 인대를 강화하는 훈련은 없기 때문이다. 1974년 투수 토미 존이 처음 이 수술을 받으면서 지금껏 토미존 수술로 불린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는 사이 수술이 흔해지고 성공률도 대단히 높아졌다고 하지만, 두 번 이상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두 번째 수술 후에도 좋은 활약을 펼치는 투수는 더욱 드물다. 2015년 만 20세에 첫 번째 토미존 수술을 받은 워커 뷸러(LA 다저스)는 그로부터 7년이 경과한 지난해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뷸러는 수술 후 20개월째 되는 내년 4월에 그라운드에 돌아온다.

2004년 만 18세에 첫 번째 토미존 수술을 받은 류현진은 그로부터 18년이 경과한 지난해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4개월 만에 돌아왔다. 첫 번째 수술에서 회복하는 데 19개월이 걸린 마에다 겐타(미네소타), 첫 번째 수술 후 17개월 만에 돌아온 존 민스(볼티모어) 등과 비교해도 류현진의 14개월 만의 복귀는 너무 빠르지 않냐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류현진이 9월17일(현지시간)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로저스센터에서 열린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홈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AP 연합

시속 100km 느린 커브로 삼진 잡아내

그렇다면 류현진의 복귀 후 성적은 어떨까. 9월21일 현재 9경기에 등판한 류현진은 3승3패 ERA 2.62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리고 있다. 4실점한 복귀전을 제외한 8경기를 모두 3실점 이하로 막았고, 피안타율 0.229는 2019년 사이영 2위 시즌(0.234)보다도 좋다. 더 놀라운 사실은 류현진의 포심 평균 구속인 시속 142km가 메이저리그 데뷔 후 가장 떨어지는 수치라는 것이다. 2019년 사이영 2위 시즌(146km)과 비교하면 무려 4km 더 느리다.

현재 류현진은 토론토의 선발투수 5명 중 가장 느린 공을 던진다. 가장 빠른 기쿠치 유세이(153km)와는 무려 11km 차이가 나며, 두 번째로 느린 크리스 배싯(149km)과 비교해도 7km 차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95마일(약 153km) 이상의 강한 타구를 허용하는 비율이 5명의 선발투수 중 가장 낮다. 투수에게는 중력의 법칙이나 다름없는 ‘속도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는 류현진의 비결은 무엇일까.

농구의 르브론 제임스에 빗대 ‘킹 펠릭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펠릭스 에르난데스는 평균 시속 151km의 강속구를 앞세워 2010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5km의 구속 감소가 일어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30대 이후 26승밖에 올리지 못한 에르난데스는 결국 169승을 끝으로 은퇴했다.

2009년 사이영상을 따냈을 때 잭 그레인키의 평균 구속은 에르난데스와 같은 시속 151km였다. 하지만 그레인키는 에르난데스와 비슷한 수준의 구속 감소가 일어난 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했다. 30대가 된 이후 올린 승수가 무려 118승에 달하는 그레인키는 지금까지도 맹활약하며 1%의 선수에게만 허락되는 명예의 전당 입성을 예약했다.

에르난데스와 그레인키의 차이점은 미래에 대한 준비였다. 에르난데스가 구단의 여러 제안에도 고집을 부리며 구속 저하에 대비하지 않은 반면, 그레인키는 스스로 공부하며 길을 찾아냈다. 그레인키가 찾아낸 비결은 구속이 떨어진 만큼 더 느리게 들어갈 수 있는 공을 같이 던지는 것이었다. 최고 구속이 시속 150km였던 투수가 140km로 낮아지면 110km인 최저 구속을 100km로 낮추면 된다는 게 그레인키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더 느린 공을 던지는 전략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강심장과 제구다.

류현진이 2013년 메이저리그에 처음 데뷔했을 때 그의 체인지업은 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 그의 체인지업이 타자들에게 간파당하자 류현진은 클레이튼 커쇼에게 배운 하드 슬라이더로 더 뛰어난 피칭을 했다. 2015년 어깨 수술에서 돌아온 류현진은 CC 사바시아를 참고해 커터라는 새 구종을 장착했고, 당시 커터는 체인지업 못지않은 무기가 됐다. 그때마다 항상 커브는 이들 주무기를 받쳐주는 보조 구종 역할을 했다.

그런 류현진이 이번 팔꿈치 수술 후 찾아낸 길은 커브다. 최고 구속이 낮아진 만큼 가장 느린 공인 커브의 속도를 더 낮춘 것이다. 올해 류현진이 던지는 커브의 평균 구속은 시속 110km로,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의 116km와 비교하면 6km나 낮다. 이는 포심의 감소 폭인 4km보다도 크다. 류현진은 8월27일 클리블랜드전에서 시속 63마일(101km) 커브로 삼진을 잡아내, 올 시즌 가장 느린 공으로 삼진을 잡아낸 투수가 됐다.

포심 패스트볼, 싱킹 패스트볼(싱커), 컷패스트볼(커터), 체인지업, 커브 등 5가지 구종의 속도를 잘게 쪼개고, 각각의 구종을 다양한 코스로 던져 수십 가지의 선택지를 만들어내는 류현진은 부상 이전의 칼날 같은 제구도 되찾았다. 류현진은 9월13일 텍사스전에서 로비 그로스먼에게 홈런을 맞았는데, 놀라운 건 이후 대처였다. 류현진은 피홈런 직후에 만난 타자를 상대로 싱커, 커터, 체인지업 세 가지 구종을 마치 한국의 양궁 궁사들처럼 완벽하게 같은 지점으로 던져, 보는 사람들에게 헛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당황한 타자가 엉겁결에 방망이를 냈다가 아웃을 당한 건 당연했다.

 

포심·싱커·커터·체인지업·커브 5개 구종으로 수십 가지 변화

물론 불안 요인은 존재한다. 느린 공을 던지는 만큼 상대가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 더 위험할 수밖에 없다. 올해 류현진이 맞은 홈런들은 실투보다는 잘 던진 공인데도 상대 타자가 잘 친 경우가 많다.

이렇듯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낸 것으로 보이는 류현진은 보너스 등판을 앞두고 있다. 소속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이영상 3위 투수이며 류현진을 한국어 그대로 ‘Hyeong(형)’이라고 부르는 알렉 마노아가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류현진이 돌아와 그 공백을 메운 토론토는 현재 막강한 투수진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류현진의 가을야구를 보기 위해서는 토론토가 포스트시즌 1라운드를 통과해 디비전시리즈에 진출해야 한다. 3전 2선승제의 와일드카드 시리즈는 선발투수 3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 팀 내 5선발을 맡고 있는 류현진은 등판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류현진이 남은 정규시즌 경기에서 해야 할 것은 팀에서의 신뢰를 높여 더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류현진의 별명은 ‘코리안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피칭 마스터’라는 말을 듣고 있다. 류현진의 피칭에 걸작(masterpiece)이라는 칭찬이 붙는 이유다. 구속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투수가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고 있다면, 갈수록 구속을 잘게 쪼개고 있는 류현진은 원자라는 또 다른 우주를 현미경으로 탐험하고 있다. 그렇게 몬스터는, 마스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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