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소년이 아시안게임 초대 금메달리스트에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7 13:05
  • 호수 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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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 김관우, 정식종목 채택된 e스포츠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우승 후 눈물 
“학교에서 혼나고 부모님께도 눈총 받던 어린 시절 떠올라”

1980~90년대 배경의 드라마를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전자오락실에서 동전을 쌓아놓고 스트리트 파이터, 갤러그, 테트리스 등에 열중하는 아이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아이의 등을 때리는 엄마. 디지털 시대에 오락실은 이제 옛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이제 PC방이 오락실 역할을 대신한다. 하지만 지난 추석 연휴 옛 추억을 끄집어내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마흔네 살 김관우의 항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김관우가 금메달을 딴 종목은 다름 아닌 ‘스트리트 파이터’였다. 그 옛날, 오락실에서 하던 그 스트리트 파이터 맞다. 1987년 처음 아케이드로 제작된 이 게임은, 1991년 선보인 두 번째 시리즈로 전 세계에 붐을 일으켰다. 비디오 게임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어가 고유 기술을 가진 8명의 캐릭터 중 하나를 선택해 잡기·던지기·장풍 등의 기술로 일대일 격투를 벌이는데 당시 상상 초월의 인기를 누렸다. 비디오 격투기왕을 꿈꾸는 이들은 오락실로 몰려들었다. 그 시대, 누군가는 ‘류’였고, 누군가는 ‘춘리’였다.

9월28일 항저우아시안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5’ 결승전에서 김관우가 대만의 샹여우린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후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e스포츠 참가 4개 종목에서 모두 메달 획득

이번에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캡콤사가 2016년 선보인 다섯 번째 시리즈다. e스포츠는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됐고, 스트리트 파이터 5를 비롯해 리그 오브 레전드(LoL), FC 온라인(옛 FIFA 온라인) 4,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왕자영요(아레나 오브 발러), 몽삼국지 2, 도타 2 등 7개 세부종목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때 시범종목이었던 스타크래프트 2는 이번 대회에서 제외됐다.

스트리트 파이터 아시안게임 초대 챔피언이 된 김관우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귀하던 시기에 어느 누가 오락실 게임이 아시안게임 메달 종목이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후반으로 날아가서 이와 같은 말을 하면 “미친 X”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그만큼이나 40~50대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스트리트 파이터는 아시안게임 종목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1979년생인 김관우의 삶은 스트리트 파이터와 함께였다. 그는 한 판에 50원이었을 때부터 전자오락실을 드나들었다. 초고수였기 때문에 ‘무서운 동네 형들’한테 맞을 뻔한 적도 꽤 있었다. 그는 “게임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한 판에 50원에서 100원으로 올랐을 때였다. 결국 버스비까지 다 털고 걸어다녔다”고 돌아본다. 오락실을 드나들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던 시절. “40대분들만 이해하실 것 같은데 학교에서 오락실에 간 것을 들키면 혼났어요. 사실 부모님도 싫어하셨죠.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하셨어요. 1등 하면 기뻐하시고, 2등 하면 왜 1등을 못 했냐고 안타까워하시고.”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3년 전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게임 스트리머로 나섰다. 지난해 스트리트 파이터 최고 권위 대회인 캡콤컵에서 한국 지역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가대표로 뽑힌 후에는 전국에 숨어있는 고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 10시간까지도 훈련했다. 결승전에서 베가 캐릭터 하나로 대만의 샹여우린을 세트 점수 4대3으로 물리친 후 김관우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스트리트 파이터 향수에 젖어있는 이들도 김관우의 금메달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스트리트 파이터가 속칭 ‘고인물’ 게임이라면, LoL은 1020세대에게 지금 가장 인기 있는 e스포츠다. 한국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때는 중국에 패했으나 항저우 대회 때는 4강전에서 중국을 꺾었고, 결승전에서 대만을 제압했다. 2018년에는 ‘페이커’ 이상혁이 주전이었다면 이번 대회에서는 ‘쵸비’ 정지훈이 힘을 냈다. 이상혁은 감기몸살 증세로 4강전에 이어 결승전에도 출전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 LoL 대표팀은 이상혁·정지훈 외에 ‘제우스’ 최우제, ‘카나비’ 서진혁, ‘룰러’ 박재혁, ‘케리아’ 류민석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 중 이상혁은 e스포츠계의 조던(농구)이나 메시(축구)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선수다. 현재 추정 연봉만 70억원에 이른다. 이번 항저우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다른 나라 국가대표 선수들마저 앞다투어 이상혁과의 인증샷을 원했을 만큼 ‘스타 중 스타’다.

한국은 스트리트 파이터, LoL 외에도 ‘비니’ 권순빈, ‘씨재’ 최영재, ‘티지’ 김동현, ‘스포르타’ 김성현, ‘파비안’ 박상철로 구성된 배틀그라운드 모바일팀이 은메달을 획득했고, 곽준혁이 FC 온라인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참가한 4개 종목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하며 e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뽐냈다.

김관우(왼쪽)와 대만 시앙 유린이 9월28일 중국 항저우 E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e스포츠 ‘스트리트 파이터 5’ 결승전 경기를 치르고 있다. ⓒ뉴시스

e스포츠, 2026년 아시안게임 때도 정식종목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 됐으나 e스포츠가 과연 스포츠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올림픽에서는 아직 e스포츠가 시범종목으로도 치러진 적이 없다. 앞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18년 올림픽 e스포츠 구상안을 점검하며 “누군가를 해하는 ‘킬러 게임’은 올림픽의 가치와 반대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격투 스포츠도 싸움에서 기원했지만, 문명화를 거쳐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e스포츠의 상징적인 존재인 이상혁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건 후 “몸을 움직여 활동하는 게 기존의 스포츠 관념인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많은 분께 좋은 영향을 끼치고 경쟁하는 모습이 영감을 일으킨다면 그게 스포츠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어 “LoL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포츠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 부모님 세대분들은 게임을 알더라도 스타크래프트 정도만 아는 경우가 많은데, 자녀분들과 함께 설명을 들으면서 보면, 그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e스포츠가 장차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될지는 알 수 없다. 아이치·나고야아시안게임에서도 e스포츠는 정식종목으로 선정돼 있다. LoL이나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은 세부종목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다만 스트리트 파이터 등 다른 e스포츠 종목의 운명은 알 수 없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아시안게임에서는 e스포츠가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시대에는 다르게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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