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다 더 무거워진 재계 총수 왕관의 무게 [권상집의 논전(論戰)]
  • 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6 15:05
  • 호수 178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인사 통해 경영 전면에 속속 등장한 재벌 3·4세들…향후 과제는 성과와 문화 두 마리 토끼 잡는 것

국내 기업의 임원 인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삼성을 포함해 국내 20대 그룹에 속하는 대기업 인사가 하나둘 공개되자 언론은 앞다퉈 1970년대생 CEO, 30대 임원의 등장 등 세대교체를 조명했다. 그러나 해마다 진행되는 임원 인사의 핵심 포인트가 세대교체에 있다는 점에서 해당 메시지가 그리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이번 임원 인사에서 젊은 오너들이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올해 승진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오른쪽)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12월6일 부산항 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부산시민의 꿈과 도전 격려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젊은 오너들, 전진 배치되다

오너에 대한 인사는 신중하게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기업 내부에선 여러 방안을 고심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오너의 성장 로드맵을 그리는 데 있어 너무 많은 책임을 조기에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재벌 오너로 불리는 2세나 3세는 가파른 승진 속도를 보이지만 대표이사(CEO) 등을 잘 맡지 않는다. 부사장 위치를 유지하다 직책을 건너뛰어 부회장 그리고 회장으로 취임하는 게 공식이다.

이 원칙은 흥미롭게도 올해 꽤 많이 흔들렸다. 예컨대, 창립 이후 최대 규모의 임원 인사를 단행한 올해 GS그룹 인사의 핵심은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의 자제인 허윤홍 사장이다. 허 사장이 GS건설의 대표이사(CEO) 사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 등의 이슈로 인해 오너의 자제가 건설사 대표로 가지 않는 건 불문율이다. 그러나 GS그룹은 검단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 등에 직면하자 책임경영을 선포했다. 허윤홍 사장이 CEO가 되면서 GS건설은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무려 40%의 임원이 교체됐다.

이는 GS만의 얘기가 아니다. 내년에 창립 100주년을 앞둔 삼양그룹은 김윤 회장의 장남이자 4세인 김건호 상무가 삼양홀딩스 사장이 됐다. 직접 삼양그룹의 전략총괄을 맡아 그룹 전체의 미래사업과 방향성을 맡게 될 것이라고 그룹 측은 강조했다. 삼양그룹과 GS그룹은 오너가 자제가 직접 사장을 맡아 경영 전반을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오너 3세 및 4세 체제로의 완벽한 전환을 알린 기업도 존재한다. 11월10일, HD현대그룹(옛 현대중공업그룹)은 정기선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는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2002년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해 HD현대를 운영해 왔는데, 21년 만에 3세인 정기선 부회장 중심의 오너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11월28일 진행된 코오롱그룹 임원 인사에서 이규호 사장 역시 부회장으로 승진해 사실상 4세 경영 체제의 닻을 올렸다.

오너가 자제를 어떤 자리에 배치하느냐는 그룹의 향후 방향성을 의미하기에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고 마지막엔 그룹 회장의 승인도 필요하기에 그 무게감이 작지 않게 따른다. 이번에 진행된 임원 인사에서 오너 2~4세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40대 초반에 그룹 전체를 지휘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게 됐다. 과거 오너의 사장, 부회장 승진이 40대 후반~50대 초중반에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10년 이상 앞당겨진 셈이다.

젊은 오너의 승진에는 늘 많은 비평과 비판이 따른다. 책임지지 않는 자리를 중심으로 승진을 거듭한다거나 성과가 입증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속 승진시켜 다른 구성원들의 박탈감을 초래한다는 등의 지적이 그동안 끊이지 않았다. 올해 진행된 임원 인사에서 승진한 상당수 후계자는 책임을 지는 자리에, 그것도 아직 젊은 나이에 전진 배치됐다. 그들의 승진을 비판하기에 앞서 젊은 오너의 전면 등장 의미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과거 후계자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과제는 성과 창출이었다. 기업이 꾸준히 이익을 창출하고 눈에 띄는 혁신적 성과를 보여야 오너의 경영 능력이 입증됐다고 언론과 시장은 평가했다. 그렇다 보니 2010년까지 재벌그룹의 오너들은 엄격한 경영수업 아래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상명하복 문화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수직적 조직구조 내에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는 것은 오너의 전공필수와 같았다.

허윤홍 GS건설 사장(왼쪽 사진)과 이규호 코오롱 부회장 ⓒ연합뉴스·코오롱 제공

2세들, 꺼렸던 대표직도 마다하지 않아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MZ세대라는 말이 이젠 지겨울 정도로 젊은 세대는 이전과 다른 문화와 다른 목소리를 기업에 요구한다. ‘대퇴사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우수 인재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안정적이고 보수가 좋은 직장을 박차고 떠난다. 과거와 같이 상명하복 그리고 회장 중심의 일사불란한 체제는 블라인드에서 가장 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는다. 기업의 시대정신은 탈권위주의로 요약된다. 그 결과, 젊은 오너들은 이제 성과와 함께 문화라는 또 하나의 과제를 부여받았다. 취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묻지마 대기업’을 부르짖는 취업준비생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대기업보다 ‘네카라쿠베’를 원하는 것이 어색한 시대가 아니다. 좀 더 소탈하고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기업의 문화를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로 전환하기 위해선 30·40대 오너가 전면에 나서는 게 효과적이다.

세계적인 석학인 린다 힐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의 혁신을 위해서는 개인의 천재성이 아닌 집단의 천재성을 일깨워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녀는 집단 천재성을 발현하기 위해선 조직 문화의 체질을 바꿔야 하는데 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걸린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점은 수평적 분위기가 조직에 정착할 수 있도록 경영자가 기업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데 있다.

성공하는 조직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조직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필요한 리더의 경영철학 및 가치다. 둘째는 구성원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수평적인 문화 조성이다. 마지막으로 구성원이 혁신을 위해 건설적인 실패를 하더라도 이를 용인할 수 있는 리더의 격려 및 지지다.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만들어야 2023년 현재 재계의 핵심 인재들은 조직에 애사심을 갖고 몰입하며 혁신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 전면에 나선 오너들의 책임경영은 분명 긍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많은 이가 젊은 오너의 철학을 지켜보고 평가하며 그들이 혁신을 위해 구성원의 도전적인 실패를 얼마나 용인하는지 예의주시할 것이다. 수평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으면 오히려 ‘젊은 꼰대’라거나 ‘퇴행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 집중된다. 왕관의 무게는 분명 과거보다 더 무거워졌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