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만 127명, 최악의 연쇄 성폭행범 ‘대전 발바리’의 정체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 정락인 언론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07 12:05
  • 호수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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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강간하면서 ‘왕’이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술집 종업원부터 주부·대학생·미성년자 등 무차별 범행

연쇄 성폭행범을 흔히 ‘발바리’라고 일컫는다. 범행 후 발 빠르게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졌다. 1998년부터 대전 지역을 시작으로 성폭행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수법과 범인의 인상착의 등으로 볼 때 동일인으로 추정됐다. 경찰이 추적에 나섰으나 쉽게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워낙 신출귀몰한 데다 날렵하게 경찰을 따돌렸다. 경찰과 언론에서는 그를 ‘대전 발바리’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발바리’의 시초가 됐다. 그의 범행은 한 여성 승객과의 시비가 발단이 된다.

ⓒ시사저널 최준필
ⓒ시사저널 최준필

한꺼번에 5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1998년 2월 어느 날 새벽, 대전 시내에서 한 20대 여성이 택시에 승차한다. 술에 취해 있던 여성은 ‘택시기사가 길도 잘 모르느냐’ 등 핀잔을 주기 시작한다. 얼마 후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요금이 많이 나왔다며 택시비를 훽 던지고 나가자 택시기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그는 비틀거리는 여성의 뒤를 따라 주택가 원룸에 있는 집을 알아둔다.

며칠 후 이른 아침, 택시기사는 보복을 결심하고 서구 월평동에 있는 여성의 집에 나타나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자 “보일러 수리공”이라고 속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요금 시비를 벌였던 여성과 동거인 등 여성 두 명이 있었다. 택시기사는 두 사람을 흉기로 위협해 결박한 후 잇따라 성폭행한다. 얼마 전에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여성이 “살려 달라”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이자 택시기사는 자기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희열이 느껴졌다. 범인은 회사택시를 몰던 ‘이중구’였다.

범행 이후 이씨는 경찰의 추적을 걱정했으나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첫 범행이 성공하자 이씨는 쉽게 두 번째 범행에 나서게 된다. 이번에도 심야시간대 술에 취해 귀가하는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를 꺼린다고 판단되자 연이어 범행에 나섰고, “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처음에는 주로 홀로 사는 유흥업소 종업원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 그는 점점 대담해졌고, 가정주부, 회사원, 여대생, 미성년자 등 범행 대상도 가리지 않았다. 이씨는 새벽운동을 하는 척하며 범행장소를 물색한 후 가스배관을 타고 화장실 창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침입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가스 검침원이나 우유 배달원, 보일러 수리공으로 행세하며 피해자들 집에 들어가 범행에 나서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 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노렸다.

가족과 함께 사는 부녀자도 범행 대상이 됐다. 한 번 성폭행한 여성을 3개월 만에 다시 찾아가 성폭행했으며, 피해자의 부탁으로 돈을 갖고 현장에 나타난 다른 여성까지 성폭행했다.

피해 여성의 남자친구를 묶어놓고 그 앞에서 성폭행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적도 있다. 한 여성을 성폭행한 후 친구를 부르게 하고, 또 그 피해자의 친구를 부르게 하는 식이었다. 2000년에는 여성 4명이 함께 사는 집에 침입해 결박한 후 이 중 1명을 성폭행한 후 3명을 강제추행했다.

ⓒ시사저널 사진자료
ⓒ시사저널 사진자료

신고 막기 위해 변태적 성행위 일삼아

이중구는 2003년 7월부터는 대전을 포함해 청주와 구미, 전주, 용인 등 전국으로 범행 지역을 넓혀갔다. 경찰 추적을 따돌리고 혼선을 주기 위한 꼼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전을 시작으로 연쇄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자 민심은 흉흉해졌다. 경찰은 범행현장에서 용의자의 정액과 체액을 채취해 유전자 감식을 벌였고, 수십 건의 성폭행 사건이 동일인 소행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용의자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했다.

이중구도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였다. 범행 후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피해 여성을 목욕시키고, 신고를 막기 위해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감추는 등 지능적인 범행을 이어갔다. 피해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변태적 성행위를 시켰는데, 수치심 때문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씨의 계획대로 일부 피해자는 신고를 꺼렸고, 경찰 수사도 그만큼 어려웠다.

성폭행 피해자는 늘어가는데 사건 해결이 안 되자 성난 여론은 경찰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도 연일 이 사건을 주요 내용으로 보도했다. 더욱 초조해진 경찰은 2000년 이후 발생한 성폭행 사건 전부를 분석하며 용의자를 압축해 나갔다. 피해자들의 공통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는 ‘왜소한 체격에 키가 작다’고 판단했다. 이씨의 범행수법 중 특이한 것은 피해자들을 결박하는 도구는 직접 챙겨 가지 않고, 침입 후에 집 안에 있던 수건을 가위로 잘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2004년 1월4일 광주 사건과 2005년 6월17일 논산 사건을 분석하면서 유력한 단서를 포착한다.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두 사건의 현장 인근에 같은 차량이 주차돼 있었던 것을 확인한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차량 번호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경찰은 차량 번호판 조회를 통해 명의자 집을 찾아갔다. 이때까지도 경찰은 이중구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마침 밖에 맨발로 나와 있던 이씨는 경찰을 보자 “양말을 신고 나오겠다”며 집 안으로 들아간 후 창문을 통해 도주했다.

경찰은 이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유전자를 대조했더니 정확히 일치했다. 최초 사건 발생 약 8년 만인 2006년 1월10일 경찰은 이중구를 대전 지역 등에서 발생한 연쇄 성폭행 사건 피의자로 특정한다.

경찰은 모든 수사력을 동원해 검거에 나섰지만, 이씨의 도주 행각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논산 처가로 향했다가 청주를 거쳐 서울로 이동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이에 맞선 경찰은 이씨의 사진과 인상착의 등을 넣은 수배전단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그해 1월18일 경찰은 이중구가 서울에서 대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알아낸다. 곧바로 형사들을 서울로 보내 그가 지인의 아이디를 도용해 인터넷 게임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경찰은 인터넷 접속기록을 통해 서울 천호동의 한 PC방에서 접속한 사실을 파악하고, 1월19일 오후 4시30분쯤 해당 PC방에서 이중구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까지 이중구는 인터넷 게임에 빠져있었고, 경찰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그는 흰색 야구모자와 푸른색 마스크를 쓰고 상의는 밤색 무스탕, 하의는 군청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흰색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씨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수갑을 찼다.

ⓒ연합뉴스
10여 년간 전국을 돌며 부녀자를 성폭행해온 연쇄 성폭행범 ‘발바리’ 이중구가 2006년 1월19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 한 PC방에서 검거됐다. ⓒ연합뉴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범행 건수

경찰 수사 결과 이중구는 1998년 2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7년8개월에 걸쳐 전국을 다니면서 강간과 강도, 절도 행각을 벌여왔다. DNA 검사로 확인된 것만 77건, 체포된 후 밝혀진 30건 등 피해자만 무려 184명으로 파악됐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강간범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이중구도 자신이 몇 차례 범죄를 저질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이 DNA 감식으로 확인한 피해자 숫자를 언급하자 “내가 그렇게 많은 성폭행을 했나요”라며 놀랄 정도였다.

강간, 강도, 절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이씨에게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피해자를 127명만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가 성폭력과 강도 범죄를 저질렀지만 살인을 하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중상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씨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고, 양측 모두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량이 확정됐다. 

 

■희대의 성폭행범 이중구는 누구

돈에 집착하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외톨이

1960년 충남 공주의 가난한 집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됐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천호동에서 구두닦이, 신문배달 등을 하면 생활했다. 남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 소년원에 들어갔고, 특수절도 2범이 됐다.

20대 초반 고향에 돌아와 문방구를 차린 후 수년간 운영했다. 이때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1990년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3년간 택시회사에 취업해 운전기사로 일했다. 1993년 개인택시를 구입해 운행하다가 1998년 성범죄를 저지르면서 ‘성실한 가장’과 ‘성폭행범’의 두 얼굴로 살아간다. 2003년 4월에는 경찰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개인택시를 처분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살아왔다. 이후 택시를 팔아 남은 돈과 직장에 다니는 20대 초반의 딸 급여, 성폭행 후 여성들에게 빼앗은 돈으로 생활했다.

이중구는 사람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고, 늘 혼자인 외톨이였다. 조기축구회 멤버로도 활동했으나, 회원들과 교류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성범죄를 시작한 후에는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여성들의 집에 침입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범인의 몸에서 악취가 났다”고 했는데, 운동 후 몸에 밴 땀 때문이었다. 술은 잘하지 못했고, 카드게임 등 도박과 인터넷 게임을 즐겼는데, 경찰에 붙잡힐 때도 게임에 빠져있었다.

이씨는 돈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피해자들에게서 빼앗은 돈은 유흥비로 탕진하지 않고 꼬박꼬박 저축했다. 검거될 당시에도 도피 자금 100만원 중 70만원이 남아있었다. 경찰이 사용내역을 보니 싸구려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구매, 빵을 사먹거나 찜질방 요금을 낸 것 등이 전부였다. 그의 통장에는 1억4000여만원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피해자들과 합의를 통해 형량을 줄일 수도 있었으나 그는 징역을 더 사는 쪽을 택했다.

이중구는 검거 당시 아내와 20년 넘게 혼인생활을 유지하고 있었고, 직장에 다니는 20대 딸과 대학생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아내와 금실이 좋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라고 알려졌다. 이씨가 구속되자 8개월 후 그의 아내는 합의이혼을 신청했고, 이씨가 받아들이면서 갈라섰다. 그의 자녀들은 지금도 가끔 아버지의 면회를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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