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할아버지께 할말 있어요”…170㎞ 대장정 나선 부녀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0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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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박11일 여정…“아빠와의 성취 경험으로 아픔 이겨나가길”
“1형 당뇨 환우 쓰러졌을 때 CPR처럼 매뉴얼 있어야”
1형 당뇨 환우인 박율아(8)양과 아버지 근용(47)씨가 세종시의회에서 정부세종청사 내 보건복지부로 걸어가고 있다. ⓒ박씨 가족 제공
1형 당뇨 환우인 박율아(8)양과 아버지 근용(47)씨가 세종시의회에서 정부세종청사 내 보건복지부로 걸어가고 있다. ⓒ박씨 가족 제공

“율아야, 아빠는 집(세종시)에서 걸어서 서울에 있는 대통령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야. 율아처럼 아픈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 병인지, 율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잖아. 아빠가 대통령 할아버지 만나게 되면 꼭 알려 주려고. 율아 생각은 어때?”

“정말요? 너무 신나요! 대통령 할아버지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어요”

1형 당뇨 환우인 박율아(8)양과 아버지 근용(47)씨는 7일 저녁 6시 세종시에서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로 향하는 10박11일 여정을 떠났다. 총 이동거리는 170㎞. 박씨 부녀는 세종시의회에서 출발해 정부세종청사 내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충남 천안, 경기 평택·오산·수원·의왕·과천, 서울 강남구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용산 대통령실을 향해 걷는다. 영하 3도를 웃도는 추운 날씨지만 자전거나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은 일절 이용하지 않는다. 오직 스마트폰에 있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두 발로 걸어간다.

박씨 부녀는 대장정의 첫 번째 목적지인 보건복지부로 걸어가면서 시사저널에 도전 계기와 준비 과정 등을 상세히 밝혔다.

 

정부세종청사→식약처→대통령실까지 170㎞ 대장정…8살 아이의 도전

율아양은 지난해 7월 1형 당뇨 판정을 받았다. 1형 당뇨는 췌장에서 인슐린을 생산하는 베타세포가 파괴돼 혈당 조절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해버린 질병이다. 생활 습관이나 경구 당뇨약으로 치료하는 2형 당뇨와 달리 1형 당뇨는 평생 인슐린 주사에 의존해야 한다.

당뇨가 발병한지 1년이 채 안 된 율아양이 긴 여정에 동행한다고 했을 때 아내는 극구 반대했다. 언제 혈당이 떨어질지 모르고 인슐린 주사 등 근용씨가 챙겨야 할 짐도 만만치 않아서다. 박씨 부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거듭 율아양의 의사를 물었지만 율아양은 씩씩하게 “엄마 아빠, 할 수 있어요!”라고 답했다. 부부는 대신 율아양에게 건강 상태에 따라 언제든 일정을 조정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1형 당뇨 환우회와 율아양을 도와줄 정영규 권선삼성내과 원장도 함께 하기로 했다.

근용씨는 다른 투쟁 방식이 아닌 율아양과 함께 걷기를 택한 이유에 대해 “삭발이나 단식도 고민해 봤지만 율아가 나중에 컸을 때 다소 폭력적이고 무섭게 느껴질까 봐 시도하지 않았다”면서 “율아가 질병을 갖고 살면서 힘든 시기가 올 텐데 아빠와 오랜 시간 걸어서 끝까지 해냈던 이 시간을 잊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율아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1형 당뇨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우울증 등을 겪는 친구들이 많다”며 “율아에게도 그런 시기가 오면 아빠와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아빠가 얼마나 율아를 사랑하는지를 되새겨보면서 힘듦을 극복하고 세상을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근용씨는 율아양과 170㎞를 걸으면서 1형 당뇨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고 했다. 1형 당뇨를 가진 환우라도 혈당 조절만 잘하면 음식도 자유로이 먹을 수 있고, 운동 능력이 저하되는 질병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2020 도쿄올림픽 테니스 금메달리스트인 알렉산더 즈베레프도 1형 당뇨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우리나라는 질병을 가졌다고 하면 아무것도 못 하고 불쌍한 존재로 낙인 찍는다”며 “아이에게 음식을 먹일 때마다 주변에서 눈치를 주거나 아무것도 못하게 할 때가 많은데 당뇨 환우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 1형 당뇨에 대한 제도적 매뉴얼이 생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 가다가 의식을 잃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심폐소생술(CPR)을 하도록 교육하는 것처럼, 1형 당뇨 환우 카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저혈당 쇼크가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1형 당뇨 환우인 박율아(8)양이 첫째날 밤 숙소인 캠핑카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박씨 가족 제공
1형 당뇨 환우인 박율아(8)양이 첫째날 밤 숙소인 캠핑카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박씨 가족 제공

최근 태안에서 1형 당뇨 자녀를 살해한 뒤 부모가 동반 자살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병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지만 근용씨는 “이제 첫걸음을 뗐다”고 했다. 그는 정부에 1형 당뇨의 중증 난치질환과 췌장 장애 인정을 요구할 계획이다.

근용씨는 “율아의 꿈이 경찰관인데 사실 1형 당뇨를 가지면 경찰이 될 수 없어 직업 선택에 제약이 있다”며 “율아는 췌장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장애 신청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전했다.

이어 1형 당뇨를 중증 난치질환으로 지정해 환우가 인슐린 주사나 펌프 등 관리기기 사용법을 배우고 영양이나 운동 등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 “소아청소년과에 가도 진료를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실적인 수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씨 부녀는 여정의 둘째 날인 8일 오전 9시께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보건복지부에서 충북 청주에 있는 식약처로 약 5시간20분에 걸친 도보 투쟁을 이어갔다. 거리는 20㎞, 성인 걸음으로 3만1260보 가량이다.

율아양은 연속 혈당기를 착용하고 크로스백을 맨 채 이날도 씩씩하게 걸었다고 했다. 근용씨는 각종 의료기기와 율아양에게 저혈당이 왔을 때 먹일 포도당 캔디·주스를 짐수레에 싣고 대통령실까지 딸의 손을 잡고 대장정을 완주하겠다며 “하늘이 허락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해보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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