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정신 근간을 파고드는 악동 만화가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10 11:00
  • 호수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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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화백의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2》

1980년대를 어린이로 지나온 이들에게 만화 잡지 《보물섬》은 교과서 못지않은 스토리를 갖고 있다. 《보물섬》은 기존 《어깨동무》나 《소년중앙》과는 두께만큼이나 차이가 큰 영향을 줬다. 그 속에서 ‘아기공룡 둘리’나 ‘달려라 하니’ ‘고교 외인부대’ 등 수많은 꿈들이 꽃피었다. 그 가운데 가장 아이들의 페르소나를 닮은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악동이’였다. 사극 전문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발을 디딘 이희재 화백은 벌써 고희가 코앞이고, 데뷔 50년도 내년이다.

그가 다시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이하 ‘사기’) 시리즈를 들고나왔다. 그는 이 작품을 앞두고, 근 30년 장고를 했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지만, 앞 두 권이 나온 이번 시리즈는 오랜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20년여동안 공을 들인 ‘삼국지’의 경우 조금은 수동적인 작업인 반면에 ‘사기’ 시리즈는 거대란 텍스트의 면면을 스스로 헤매면서 끄집어낸 정수를 모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이토록 긴 시간을 ‘사기’라는 숲에서 헤맸으며, 그 성과는 무엇일지를 물어봤다.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2》 이희재 글·그림|휴머니스트 펴냄|233·240쪽|각 1만4000원 ⓒ조창완 제공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1, 2》 이희재 글·그림|휴머니스트 펴냄|233·240쪽|각 1만4000원 ⓒ조창완 제공

만화계 산증인이 ‘사기’에 관심 가진 이유는

“사십이 다 돼 사마천의 ‘사기’를 만났다. 수천 년 전 타국의 역사가 이렇게 재미있구나. 어찌 이리 흥미로운가 생각했다. 사기는 역사서 이전에 인간들 사이 생사부침의 드라마다. 살면서 다투고 어울리는 어느 세상에나 있는 이야기다. 각각의 사람과 무리가 움직이고, 시대와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세상의 히스토리다. 특히 열전은 당대를 살다 간 온갖 인간들의 영욕과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십이라면 벌써 30년 전이다. ‘사기’를 만나면서 자신의 청년 시절이 양념이 빠진 음식처럼 밍밍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후 다양한 사기 콘텐츠들을 접근하면서 어떻게 씨줄과 날줄과 엮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2014년에야 작업을 시작해 첫 결과로 우선 2권을 출간했다. 전체는 7권이고, 내년 상반기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열전을 중심으로 그리려 했는데, 이야기에 욕심이 생기다 보니 부피가 커져 갔다. 그런 마음을 제어하면서 열전의 인물을 본기와 세가의 줄기와 얽으면서 흥미롭게 수놓기 위해 노력했다. 저마다 인물들의 매력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했고, 해를 거듭하면서 몸의 한계와도 싸워야 했다. 면구스럽지만 궁형을 당한 채 죽간을 채워 나갔던 사마천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독자들은 만화라서 쉬운 콘텐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사마천의 정신과 그것을 구현하는 이 화백의 고뇌들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은나라를 폐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나 강태공의 고뇌와 종주국을 폐할 수 없다는 백이·숙제의 고뇌를 공평하게 다룬 점도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중국사에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독자들은 작가가 펼쳐놓은 ‘사기’의 이야기 속으로 편하게 몰입할 수 있다. 만약 작가가 사기와의 거리를 더 가깝게 하지 못했다면 독자들은 이야기에 빠져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으로 분류된 3000여 년의 대용량 데이터다. 열전의 인물들은 세가, 본기의 줄기와 종횡으로 얽혀 있다. 모두를 담아내는 일은 어차피 만만치 않다. 나름대로 의미 있고, 흥미 있는 인물과 사건을 간추려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모습을 그려야 했지만 역사 속에 담긴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공을 들였다.”

실제로 저자는 백이·숙제나 친구를 위해 자신을 낮춘 포숙, 인재를 잘 알아본 안영, 험난한 꼴을 보지만 정치를 통해 세상에 빛이 되려 했던 공자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강력한 군주들의 이야기보다 평화로운 이들의 스토리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작가가 이런 이야기에 마음을 쏟는 것은 삶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한국전쟁이 정전으로 가기 전인 1952년 전남 완도의 신지도에서 난 작가는 열 살에 만화를 처음 접하고 빠진 후, 스무 살부터 명랑만화가 이정문과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를 거친 후, 1981년 ‘명인’으로 데뷔했다.

 

이 화백의 순박한 화풍 최대 매력

하지만 만화계 역시 총판 등이 시장을 좌지우지해 생계가 쉽지 않았다. 또 데뷔작부터 당국은 암울한 현실을 그렸다는 이유로 작품을 난도질했다. 1983년부터 《보물섬》에 ‘골목대장 악동이’를 연재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사 온 ‘악동이’가 그 동네 최고 권력자였던 골목대장 ‘왕남이’를 박치기로 제압하고, 혁명에 성공한다는 기둥 줄거리를 가졌다. 당시 군부독재 아래서 권력에 아부하며 기생하는 현실 정치판과 이에 눌려 살아야 했던 민중의 삶을 성공적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인기가 있어서 별말은 없었다. 감시하는 사회를 나름으로 겪으며 청춘이 흘러갔다. 그동안 권력과 사회가 바뀌며 이제는 숨을 쉴 만한 세상이 됐다. 많은 희생을 치른 결과다. 이제는 창작자들에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뜻한 것을 그리고 펼칠 수 있는 세상이다. 젊은 작가들도 작품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 열정이 필요한 시기다.”

작가의 《사기》 시리즈는 국내에도 김영수, 김원중, 신동준 등을 비롯해 적지 않은 텍스트가 있고, 다양한 해설서들이 있다. 하지만 원전 번역에 공을 들이다 보니 독자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이 화백의 《사기》는 그런 무거움 대신 독자들이 쉽게 ‘사기’를 접하고, 역사 속 인물들을 흥미롭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출간이 시작된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로 이희재식 순박한 화풍을 빼놓을 수 없다. 이 화백의 그림 속 선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산하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그 인물이 주는 상징성들을 빼놓지 않고 살리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한 30년의 시간으로 인해, 독자들은 ‘사기’라는 인류 고전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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