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의 죽음…같은 처지 100여세대 더 있다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0 15:05
  • 호수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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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약 끝나기도 전에 경매 넘어간 집들…주거지원 된다지만 현장에선 “임시거처 부족”

“I Can Do All Things Through Christ Who Strengthens Me(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천 미추홀구의 30대 전세 세입자 A씨의 2018년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이와 같이 적혀 있었다. 성경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오는 글귀다. 기독교인으로 추정되는 A씨는 “good life” “고독한 정의의 승부사” 등 긍정적 글귀로 카톡을 채웠다. 그러던 A씨는 2월28일 전셋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틀 전인 26일 A씨는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Is it today?(오늘인가?)” 경찰 조사 결과, 그가 교계에서 금기시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잠정 결론이 났다.

무엇이 그를 건실한 믿음까지 저버리게 할 만큼 무서운 절망 속으로 내몰았을까. A씨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었다고 한다. “더는 못 버티겠다. 정부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다.” 미추홀구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 따르면 A씨는 전세 사기를 당하고도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한 피해자는 대책위 내에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 사실을 인정받고 지원 대상이 된다고 해도 현장에선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사저널 박정훈
‘건축왕’ 남씨가 전세 사기를 시작한 곳으로 알려진 인천 미추홀구 H아파트 모습 ⓒ시사저널 박정훈

계약 전 경매된 112세대…“피가 마른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지난해 9월부터 정부 주거안정 대책에 따라 ‘전세피해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법률·주거·금융 서비스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전제조건은 ‘전세계약 종료 후 피해를 본 자’다. A씨의 경우 2021년 10월 전세계약을 맺고 빌라에 들어왔다. 계약은 오는 10월 끝나기 때문에 A씨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시사저널이 대책위의 피해 현황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세계약 종료 전에 집이 경매로 넘어간 세입자는 대책위 안에서만 112명(3월6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HUG 홍보팀 관계자는 “지원을 받으려면 피해액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는 전세계약이 끝나고 경매 낙찰이 이뤄져야 산정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지원 여부가 경매 낙찰 이후에 결정되다 보니 애매한 상황이 발생한다. 물건이 경매에 나오면 법원이 매각기일(경매기일)을 정해야 경매가 시작된다. 그사이 법원은 감정평가를 하고 권리자들은 배당요구 신청을 한다. 최초 매각기일이 잡히기까지는 경매 신청일로부터 통상 5~6개월이 걸린다. 하지만 요즘은 금리 인상으로 경매시장에 매물이 쏟아지면서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경매가 예정돼 있는데 매각기일이 잡히지 않은 주택은 인천 미추홀구에만 680여 건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임대차계약을 맺은 주택은 524건이다. 심지어 1년 넘도록 경매가 진행되지 않는 집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경매에 나온 A씨의 전셋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책위 관계자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더 큰 문제는 생업 등을 이유로 이사를 가야 할 때다. HUG는 전셋집이 낙찰되지 않아도 계약 종료 후 세입자가 임차권 등기를 해놓으면 주거지원을 해주고 있다. 단 그 조건은 ‘피해 발생지에서 타 시·군·구로 직선거리 40km 이상 이전’하는 것이다. A씨의 경우 서울 강동구나 수원 영통구로 가도 지원받을 수 없다. 안상미 대책위 위원장은 “주거지원을 받는다 해도 6개월 단기 계약이고, 연장된다고는 하지만 전세 사기 피해자가 너무 많아 임시 거처가 부족하다고 들었다”고 했다.

A씨는 최우선 변제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지역별로 일정액 이하의 전세금을 낸 임차인은 대항력이 없어도 전세금의 33~35%를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다. 인천의 경우 전세금 6500만원 이하면 최고 2200만원을 최우선 변제받는다. 하지만 A씨의 전세금은 기준치보다 500만원 높은 7000만원이다. 기준치보다 1원이라도 높으면 최우선 변제금을 받을 수 없다. 더군다나 A씨는 최근 실직해 구직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책위가 정리한 피해 현황 자료에는 A씨의 전세금 옆에 ‘전재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추홀구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가 3월6일 저녁 인천 주안역 앞에서 A씨를 기리는 추모제를 진행했다. ⓒ
미추홀구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가 3월6일 저녁 인천 주안역 앞에서 A씨를 기리는 추모제를 진행했다. ⓒ시사저널 박정훈

“일부러 경매 넘겨 내쫓으려 한 것 아닌가”

A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미추홀구에선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H아파트는 미추홀구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주택이다. 이곳은 이번 전세 사기의 주범인 ‘건축왕’ 남아무개씨(61·구속)가 범행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H아파트는 전체 105세대 중 95세대(90.4%)가 일제히 경매에 나왔다. 예상 피해액은 37억원이 넘는다. 3월6일 기자가 H아파트를 둘러보니 곳곳에 “사회적 재난 현장에서 경매하는 당신도 가해자!” “내부박살 입찰금지” 등 경매 입찰에 부정적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낙찰되면 HUG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지만, 당장 쫓겨나는 게 두려운 분위기였다.

이미 경매에서 낙찰돼 소유권 이전을 앞둔 세대도 있다. 대책위에 따르면 이번 전세 사기로 피해를 본 3131세대 중 2111세대(67.4%)가 경매를 앞두고 있거나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45세대가 경매로 매각됐다. 여기서 4세대를 뺀 나머지는 임차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낙찰받았다. 세입자가 집을 비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한 세입자는 두리번거리는 기자를 보더니 “어디서 오셨냐”며 경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건축왕’ 남씨 일당이 이 아파트를 일부러 경매에 넘긴 후 세입자들을 내쫓고 재분양하려 했다는 얘기가 돈다”며 “남씨는 구속됐지만 그 일당이 입찰하러 올지 누가 알겠나”라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다른 세입자 공아무개씨는 “이전에도 전세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어 이 집을 구할 때는 정말 조심했는데, 임대인과 공인중개사가 짜고 사기를 치니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공씨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에서 대책이 나오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3월6일 저녁 인천 주안역 광장에선 A씨 추모제가 열렸다. 30분도 안 돼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실질적 대책과 사기범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을 했다. 안상미 위원장은 “남씨 일당 전원을 구속하고 은닉재산을 추적∙몰수해 피해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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