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여성 관리자 수’도 공시하게 해야
  •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4 10:05
  • 호수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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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유발하면 더 적극적으로 여성 인력 활용 가능
女 관리자 증가, 인구 문제 해소에도 도움

2004년 필자는 기자로 일하며 우리나라에서 처음 100대 기업 여성 임원 현황을 조사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글로벌 기업 미국 휴렛팩커드(HP)에서 칼리 피오리나라는 여성 전문경영인(CEO)이 맹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에서는 여성 CEO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조금이라도 찾아보고자 먼저 100대 기업에서 활약하는 여성 임원 현황부터 조사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때는 여성 임원 현황을 파악하려면 다소 고전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100대 기업의 홍보 담당자 등에게 일일이 전화로 문의해 조사해야만 했다. 그렇게 전화로 일일이 파악된 100대 기업 여성 임원은 13명에 불과했다. 조사된 여성 임원 중에는 윤송이 현 엔씨소프트 사장도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0년 8월 경기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여성 임직원들과 대화하는 모습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0년 8월 경기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여성 임직원들과 대화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임원 성별 공시 후 여성 임원 꾸준히 늘어나

100대 기업 여성 임원 현황 조사는 이후 몇 번밖에 더 진행하지 못했다. 매년 100곳이나 되는 회사에 일일이 전화로 여성 임원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다소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성 임원 현황을 해당 기업들에 일일이 전화하지 않고도 좀 더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는 묘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정기보고서에 기재하는 임원 명단에 성별(性別)만 표기해 주면 누구라도 조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장회사라면 사업보고서나 분기·반기보고서 같은 정기보고서에 이름과 출생연도, 주요 업무 등을 기재한 임원 현황을 포함하게 되어 있었다. 이미 임원 이름 등은 기재되어 있으니 여기에 성별만 추가로 넣어주면 되는 매우 간단한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쉽고 당연한 방법이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임원의 성별을 기재해야 한다는 서식 규칙 규정은 따로 없었다.

이에 필자는 국회 관련자 등 주변 사람들에게 정기보고서 등에 임원의 성별을 표기해 주면 일일이 확인 전화를 하지 않고서도 여성 임원 조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여성 임원도 자연스럽게 증가하리란 내용도 부연했다. 

이어 2013년에 정기보고서 등에 임원 성별을 기재하는 방향으로 규칙이 개정됐다. 필자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오랫동안 제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질적으로는 2014년에 제출하는 정기보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임원의 성별이 표기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100대 기업 여성 임원 현황을 일일이 전화해서 처음 파악했던 2004년 이후 1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다.

임원 성별이 공개된 이후 여성 임원이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는 효과는 수치로도 여실히 입증됐다. 매년 여성 임원은 꾸준히 증가해 2022년 기준 100대 기업 여성 임원 숫자가 400명을 넘어섰다. 필자가 2004년 조사했을 때 13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30배 이상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유리천장이 깨진 건 결코 아니다. 유리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나마 최근에야 국내 100대 기업 여성 임원 비중이 5%를 겨우 넘긴 정도다.

그렇다면 여성 임원을 지금보다 더 많이 나오게 하려면 제도적으로 어떤 점을 보완해야 좋을까. 지금 시점엔 성별 관리자 인원과 비율을 공개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통상적으로 관리자급이라고 하면 과장에서 부장 정도 직위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직위가 많이 사라지고 있어 업무나 연차 등에 따라 일반 직원과 관리자층을 구분하는 경우도 많다.

쉽게 설명해 전체 직원 중에서 관리자급에 해당하는 남성과 여성 직원이 얼마나 되는지를 인원과 비율 수치로 공개하자는 얘기다. 이렇게 했을 때 표출될 수 있는 효과 중 하나는 장기적으로 지금보다 회사를 오랫동안 다니는 여성 인재가 차츰 많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마다 여성 관리자 비중을 경쟁적으로 늘리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여성 직원을 늘리는 게 남성에게는 또 다른 역차별이 될 우려도 분명 존재한다.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더 많이 채용하고 관리자와 임원급을 늘려야 한다는 것에는 필자도 동의하지 않는다. 기업은 최적의 인재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끌어내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성별에 따른 인사 승진과 임금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부 기업, ESG 보고서 통해 성별 관리자 비율 명시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당면 과제를 생각하면 여성 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매우 심도 있게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구 감소다. 인구는 경제는 물론 교육, 소비, 지방 소멸 등 국가의 미래에 관한 거의 모든 부분과 연결돼 있다. 특히 고령층은 증가하고 신생아 수는 줄어드는 지금 같은 구조에서 인구 감소는 우리나라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거의 나오지 않는 국가 중 하나다. 대신 우수한 인적자원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라 인재를 차별화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오히려 여성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인구 감소 여파를 딛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성 인재 활용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생전에 여러 차례 강조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의 여성 인재 활용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단순 비율만 놓고 보면 지난해 100대 기업 기준 여성 직원은 전체 고용 인력 10명 중 2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임원으로 올라가면 10명 중 0.5명으로 더 낮아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신입 사원은 전체의 30~40% 수준으로 뽑더라도 관리자급까지 올라가는 여성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기에 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도 작은 것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출산과 육아, 자녀 문제 등으로 인해 여성 인재 중 상당수가 어쩔 수 없이 퇴사하다 보니 관리자로 남는 비중이 낮은 것이다.

역으로 여성 관리자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진다는 것은 출산과 육아, 자녀에 관한 여러 문제가 다소나마 진전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장기적으로 여성 인력을 극대화하려면 단기적으로는 여성 관리자층을 두텁게 하는 게 중요하다. 관련 수치를 좀 더 빠르게 증가시키려면 상장회사 정기보고서 등의 임직원 현황에서 성별 관리자급 직원의 인원과 비율을 별도로 추가해 공개하면 된다. 이 공시가 현실화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마다 경쟁적으로 여성 관리자 비율을 높이려는 노력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성별 관리자급 정보 공개가 기업에서 매우 민감해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미 일부 대기업은 정기보고서가 아닌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보고서를 통해 자발적으로 성별 관리자 비율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공개할 수 있는 항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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