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극장가 승부수, 불안불안하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9.17 14:05
  • 호수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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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12일 쉬는 황금연휴 맞아 한국 영화 대작 무더기 개봉
바뀐 소비 패러다임 속 과열 경쟁 ‘독’ 될까 우려

엔데믹 이후 맞은 첫 여름 시장. 극장 회복 시그널은 없었다. 《밀수》를 시작으로 《더 문》 《비공식 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이 1주일 간격으로 스크린을 공략했지만, 《밀수》가 체면치레했을 뿐 나머지는 손익분기점에 겨우 근접하거나, 심각하게 부진하거나, 완전히 망했다. 광복절 특수를 노리며 동시에 나선 《보호자》와 《달짝지근해: 7510》도 아쉬운 성적에 머물렀다. 상황의 심각성은 수치가 말해 준다. 8월 전체 매출액은 팬데믹 이전인 2017년~2019년 8월 전체 매출액의 61.8% 수준. 2019년 이전의 극장 분위기로 아예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비관론이 슬슬 나오는 이유다. 극장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파이(수익) 자체가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개봉 전략이 관객의 소비 패러다임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크다. 티켓값 상승과 맞물려 관객은 냉정해졌고, 영화 선택도 깐깐해졌다. ‘똘똘한 한 편’을 골라 보려는 움직임 앞에서, 경쟁 영화가 밀고 당기며 시너지 효과를 내는 쌍끌이 흥행은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다. 과열 경쟁이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성수기 여름 개봉 영화 4편을 합해, 비수기에 개봉한 《범죄도시3》 하나를 넘지 못했다. 올해만 그런 게 아니다. 작년에도 《범죄도시2》 한 편이 여름 대작 4편과 맞먹는 흥행 화력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이제 ‘여름=성수기’라는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처럼 특정 시기에 대작이 다 같이 격돌하는 전략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물음이 미처 무르익지 않은 가운데, 추석 영화들도 하나둘 개봉 소식을 전해 왔다. 상황이 좋지 못하다. 《1947 보스톤》 《거미집》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9월27일 동시 출격한다. 출혈경쟁의 말로를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이러는 건 자충수다. 지금의 한국 영화 시장은 대작 영화 세 편을 한 번에 품을 여력이 없다. 관객이 분산되거나, 누군가가 독식할 확률이 크다. 《더 문》처럼 또 한 번 큰 좌절이 발생할 수도 있다.  

짬밥 굵은 배급사들도 세 편이 한날한시 개봉하는 게 무리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개봉을 밀어붙이는 데는 긴 연휴의 유혹이 크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10월2일에 개천절(3일)과 한글날(9일)과 연차만 잘 섞으면 최장 12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가 이어지면서 배급사들에 매력적인 시장이 돼버린 것이다. 한 놈만 살아남는 시장에서 내가 그 ‘한 놈’이 될 수 있다는 희망 회로도 놓지 못할 것이다. 흥행 실패를 예상하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대박 꿈 하나쯤 품고 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도나 상생을 따질 분위기가 아니다. 박스 자제가 쪼그라진 극장가는 적자생존의 정글일 뿐.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1947 보스톤》, 국뽕이 걱정? 

《1947 보스톤》은 2019년 촬영에 돌입해 2020년 크랭크업한 영화다. 예정대로라면 2021년 설 연휴에 우린 이 영화를 봤어야 했다. 그러나 출연 배우 배성우의 음주운전 혐의로 개봉이 밀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그렇게 2년 반이나 늦게 극장에 당도한다. 그러니까 영화 개봉 자체가 ‘길고 긴 마라톤 일정’이 된 셈이다. 

영화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그리고 이들과 사제지간으로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 서윤복이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처음 달고 이룬 기적에 대해 다룬다. 강제규 감독은 이미 한 차례 마라토너들을 그린 바 있다. 2011년 내놓은 영화 《마이웨이》에서 장동건이 제2의 손기정을 꿈꿨던 조선 청년 준식으로, 오다기리 조가 일본 최고의 마라토너 타츠오로 분해 달렸었다. 알다시피 《마이웨이》는 흥행에서 크게 넘어졌다. 그때의 아쉬움을 《1947 보스톤》으로 만회할 수 있을까.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영화의 허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대중의 취향이다. ‘신파’와 ‘국뽕’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그리고 얼핏 《1947 보스톤》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강제규 감독도 알고 있는 듯하다. “로그 라인만 보면 제가 봐도 국뽕”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스스로 언급했다. 약점을 돌파하는 것도 결국 선택한 이들의 몫일 것이다. 강제규 감독은 이렇게 덧붙였다. “국뽕이라고 할 분도 있겠지만, 궤는 분명히 다른 국뽕”이라고. 관객은 이 말에 동의하게 될까, 반박하게 될까.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거미집》, 블랙코미디 괜찮을까? 

《거미집》은 《조용한 가족》(1998)을 시작으로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밀정》(2016) 등을 함께 한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콤비의 5번째 협업작품이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서 먼저 공개되며 기대를 높였다. 1970년 초 검열의 시대가 《거미집》의 배경이다. 감독 김열(송강호)이 ‘걸작이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촬영이 끝난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고자 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급물살을 탄다. 

한국 거장 감독들(봉준호, 박찬욱, 김지운)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송강호가 연기한 감독은 어떤 모습일지가 감상 포인트. 송강호 외에도 오정세, 임수정, 정수정, 전여빈 등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끈다. 김지운 감독이 초창기 코미디 영화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에서 선보였던 독특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만, 블랙코미디 장르라는 점에서 《1947 보스톤》과는 다른 의미의 취향을 탈 수 있다. 고(故) 김기영 감독 유족들이 주인공 김열이 고인을 모티브로 해 인격권을 침해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면서 개봉 전에 부정적 이슈가 일어난 것도 오점이다. 

ⓒCJ ENM 제공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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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사》, CJ ENM 상처가 아물까 덧날까 

개봉 중인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유재선 감독의 《잠》은 묶여서 자주 거론된다. 전자가 박찬욱 감독, 후자가 봉준호 감독의 제자라는 점 때문이다. 덕분에 두 영화는 두 거장으로부터 지원사격도 받았는데,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의 경우 봉준호의 《기생충》과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조감독 출신의 첫 연출작이다. 배경이 여러모로 든든해 보이는 게 사실. 영화는 귀신을 믿지 않지만 귀신 같은 통찰력을 지닌 가짜 퇴마사 천박사(강동원)가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력한 사건을 의뢰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검은 사제들》에서 신부로 분해 퇴마 연기를 선보인 바 있는 강동원이 퇴마사 천박사를 연기하는데, 특유의 ‘말빨’로 사기를 일삼는다는 점에서 《검사외전》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강동원의 매력이 큰 영향력을 지닌 작품이다. 

CJ ENM으로서는 이 작품의 흥행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외계+인 1부》가 새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더 문》이 상처를 더 헤집어놓은 상태. 두 영화 외에도 지난 몇 년간 CJ ENM의 영화 흥행 성적은 F학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추석에 대한 기억이 좋다. 지난 추석을 조준해 개봉한 《공조2: 인터내셔날》이 69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서 웃었기 때문. 물론 《공조2》 단독 출전인 덕이 컸다. 올해엔 경쟁자들이 세다. CJ ENM은 올해 송편을 먹을까, 쇼크를 먹을까. 

ⓒ(주)NEW 제공

《가문의 영광6》, 흥행은 돌아오는 거야? 

추석 극장가에 앞선 영화만 있는 건 아니다. 연휴 막바지인 10월3일에는 강하늘·정소민 주연의 《30일》이 개봉한다. 그리고 9월21일엔 이 영화가 ‘리턴즈’라는 부제를 달고 10년 만에 돌아온다. 《가문의 영광6》이다. 철 지난 브랜드로 저평가받고 있지만, 엄연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리즈다. 특히나 이 시리즈는 추석에 강한 면모를 보였었다. 2002년 추석 52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코미디 영화의 흥행 역사를 새롭게 쓴 바 있고, 《가문의 영광4》도 《푸른소금》 《통증》 《챔프》 등을 제치고 2011년 추석 극장가에서 1위를 달리기도 했다. 

영광→위기→부활→수난→귀환→리턴즈로 이어지는 이 가문의 역사가 추구하는 노선은 확실하다. 웃기자! 웃기자! 웃기자! 배우들도 말한다. “작품성 따위는 없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 작가주의적 작품성을 기대할 관객도 없다.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은 것도, 관객이 원하는 것도 재미일 뿐. 지향점이 명확한 코미디 기획물이 2023년 극장가에서 어떤 성적을 일궈낼지, 사뭇 궁금하다.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인 유머는 부디 아니길. 

OTT와의 장외 대결 

이제 극장 영화들은 장외 싸움도 해야 한다. OTT다. 실제로 2년 전의 추석 연휴 승자는 극장 영화도 TV 예능도 아닌,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었다. 극장가의 성수기와 비수기 구분이 흐려진 데는 OTT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다. 콘텐츠 소비가 OTT로 분산되면서 극장의 파이도 함께 가져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8월 여름 대작들은 디즈니 《무빙》, 넷플릭스 《마스크걸》과 이슈 선점을 두고 경쟁했다. 개봉 전략에 이제 OTT 라인업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번 추석도 마찬가지다. 최장 12일간 이어지는 연휴는 OTT 플랫폼에도 호재다. “영화 한 편 보러 가자” 대신 “OTT나 몰아 보자”가 더 득세할 수도 있다. 《무빙》으로 존재감을 키운 디즈니는 지창욱, 위하준 주연의 《최악의 악》을 9월27일 공개한다. 1990년대 한·중·일 마약 거래의 중심인 강남연합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 준모(지창욱)가 강남연합의 보스 기철(위하준) 조직에 잠입해 수사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액션 드라마 누아르다. 이거, 《신세계》 아니냐고? 실제로, 기시감이 크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만든 제작사가 《신세계》를 만든 제작사고, 감독은 심지어 《신세계》 조감독 출신이다. 정면 돌파에서 오히려 자신감이 읽힌달까. 

넷플릭스는 김남길 주연의 《도적》을 통해 《오징어 게임》의 영광을 다시 노린다. 《도적》은 1920년으로 간다. 무법천지의 땅 간도에서 독립운동가와 일본군이 격돌하는 액션 활극이다. 김남길이 도적단 두목 이윤으로 분해 황야를 질주하고, 서현이 조선총독부 철도국 과장과 독립운동가라는 이중 신분을 가진 남희신을 연기한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니, 긴 코트를 휘날리고 장총을 쏘는 이윤에게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느낌이 물씬 난다. 김남길의 ‘간지’가 안방에서 호응을 얻을까. 공개는 9월2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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