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왜 만들어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1 12:0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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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 신작 《거미집》, 1970년대 영화 현장 조명…‘영화 산업 위기론’ 팽배한 현재에 대한 고찰 묻어나

영화가 뭐라고. 《거미집》을 보는 내내 든 생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럼에도 영화!’를 외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이자, 김지운 감독의 신작인 《거미집》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둘러싼 창작의 고뇌와 열망을 그리는 소동극이다.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등 감독의 초기작에서 발견되던 블랙 코미디의 기운이 물씬하다. OTT와 숏폼 그리고 유튜브가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릴 듯한 시대에 여전히 영화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증명과도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뭉클한 구석이 있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1970년대로 시계를 돌린 이유

“그대로 찍으면 틀림없이 걸작이 된다. 이걸 알고도 비난이 무서워 피하면 죄악이 된다.” 반복해 꾸는 꿈에서 걸작의 기운을 감지한 김감독(송강호)은 이미 다 찍은 영화의 결말을 바꾸려 한다. 이틀의 말미만 있으면 해결될 것도 같지만 상황은 만만찮다. 세트는 이미 철거를 시작했다. 배우들은 이미 다른 작품 촬영에 여념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검열이다. 결말을 수정한 시나리오는 아직 문화공보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는데,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불허될 여지가 충분하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주인공 민자(임수정)가 욕망을 불태우며 남편과 시부모에게 복수하는 인물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걸작의 기회를 포기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김감독은 결국 사람들을 불러모아 재촬영을 감행한다. 불평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유일한 조력자는 미도(전여빈). 김감독의 스승인 거장 신감독의 조카이자, 제작사 신성필림의 재정 담당이다. 우여곡절 끝에 카메라는 다시 돌아가지만 호세(오정세)와 유림(정수정) 등 주연배우들의 온갖 불평, 재촬영 금지를 못 박으며 해외로 떠났던 신성필림 대표 백회장(장영남)의 귀환, 문공부 공무원의 단속까지 김감독에게 닥치는 위기는 산 넘어 산이다.

《거미집》은 ‘영화 만들기의 영화’를 자처한다. 무대와 백스테이지를 함께 비추듯 카메라 앞과 뒤의 상황을 번갈아 오가는 구조다. 아수라장 같은 촬영장 상황은 컬러로, 김감독이 촬영 중인 영화 ‘거미집’은 흑백 화면으로 구분한다.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여러 캐릭터의 앙상블과 속사포 같은 대사가 유머를 책임지는 사이, 《거미집》은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 속으로 돌진해 간다. 왜 지금 1970년대의 영화 현장인가. 극 중 영화인 ‘거미집’은 《하녀》(1960) 등으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의 작품들을, 김감독의 스승인 신감독의 존재는 당대 최고의 감독 중 하나였던 신상옥 감독을 느슨하게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대를 대표했던 아이콘들의 상징성만을 가져온 것에 가깝다. 그보다 《거미집》에서는 시대 배경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당시 한국의 영화 산업과 창작자들은 긴 암흑기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대중문화예술에 정부 검열이 필수였던 터라 대본 사전 심의는 물론 완성본 사후 심의까지 거쳐야 했다. 검열을 앞서는 창작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창작의 무덤이라 여겨지던 그 시절에도 영화는 이어졌다. 영화 산업이 완전히 멈추다시피 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김지운 감독의 시선이 과거로 향한 진짜 이유다.

그는 《거미집》이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1970년대의 선배 감독들은 어떻게 영화를 찍었을까 고민하다 만들게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무엇이며 끝내 무엇이 되려 하는가. 위기의 순간마다 창작자들은 자신의 행위에 어떤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나아갔는가. 팬데믹 이후 한층 더 위기론이 짙어진 산업 안에서 이 질문은 창작자들의 현실적 고민이 되고 있다. 《거미집》은 그 과정을 통과해 나온 하나의 결과물이다. 영화의 미래에 대해 누구도 뾰족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일단 질문 자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영화 《거미집》의 장면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장면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장면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거미집》의 장면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창작의 지난한 고통을 견디게 만드는 것

보란 듯이 걸작을 만들어 세간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바람은 기실 모든 창작자의 욕망이다. 특히 아직도 위대한 거장 감독이었던 스승의 그림자 아래에 있는 데다, 데뷔작의 성공 이후 늘 싸구려 치정극이나 만든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한 김감독은 차기작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김감독의 간절한 바람은 타인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아집일 뿐이다. 특히 백회장의 한마디가 결정적이다. “걸작을 왜 만들어요? 그냥 하던 거 하세요.”

누구도 보지 못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김감독의 강박적 태도는 ‘플랑 세캉스(plan-séquence·원 신 원 컷)’로 수렴된다.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된 민자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마지막 장면을 원테이크로 완성하려 한다. 이는 김감독의 무리한 고집이긴 하지만 하나의 리듬, 끊을 수 없는 앙상블이자 에너지는 영화 현장에서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무언가이기도 하다. 감독이자 작가 캐릭터는 창작자의 자전적 고백이라는 필연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하고자 하는 김감독의 의지는 작품 밖 실제 감독의 의지와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거미집》 속 김감독의 고뇌는 모든 창작자가 수시로 겪을 혼란과 이어진다. 수많은 방해꾼, 쏟아지는 악평, 자신의 비전과 현실적 문제들 사이의 간극이 매 순간 창작 의지를 꺾는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따로 있다. 애초에 내게 재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의 현상 유지는 그저 잘 포장된 잔재주 덕분이라면? 그냥 운이 좋았다면? 김감독의 공포를 경유한 《거미집》은 픽션을 빌린 모든 창작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김감독이 현장의 유일한 지원자인 미도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모종의 결의를 도모하는 장소는 성당의 고해성사 내부 세트다.

영화 촬영을 둘러싸고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만든 거대한 소동의 풍경 안에서 《거미집》이 끝내 털어놓는 진심은 소박하다. 이 모든 괴로움과 자기 검열과 강박에도 작업을 멈출 수 없는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고. 그것만이 여전히 영화를 만들게 하는 동력이라고. 오묘한 표정으로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김감독의 얼굴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연약하게나마 희망을 볼 것인가, 체념과 절망을 볼 것인가. 1970년대로 시계를 돌린 영화의 풍경이 산업 위기론이 팽배한 2023년에 말을 걸어온다.

 

■따로 또 같이, 극강의 연기 앙상블

《거미집》의 재미는 현장이 얼마나 엉망진창이든 카메라 앞에서는 최선의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상황이 절반 이상 책임진다. 기괴하기까지 한 김감독의 비전을 소화하기 위해 이를 악무는 캐릭터들에게선, 서로에 대한 애증을 수시로 주고받는 감독과 배우들의 관계가 엿보인다. 바뀐 각본에 은근히 만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민자 역의 임수정, 불륜 관계를 숨기느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유림의 눈치를 보는 호세 역의 오정세, 히스테릭한 태도로 현장의 불협화음을 높이는 유림을 연기하는 정수정의 합이 능청스럽다. 기세로 모든 것을 돌파하려는 듯한 태도의 미도를 연기하는 전여빈의 에너지도 극의 좋은 흐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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