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문 소설을 2인극 뮤지컬로 즐긴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27 13:05
  • 호수 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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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웹스터의 대표 소설 《키다리 아저씨》 무대로 옮겨와
존 캐어드의 섬세한 극본과 폴 고든의 서정적 음악 돋보여

어릴 때 읽은 소설 중에서 소녀의 옆으로 키 큰 신사의 그림자가 드리운 표지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로 1912년 미국의 여성 문학가 진 웹스터(Jean Webster·1876~1916)가 쓴 소설이다. 원제는 ‘긴 다리 아저씨(Daddy-Long-Legs)’로 사전적 의미로는 ‘다리가 긴 장님거미’를 뜻한다. 이 작품에서는 17세의 고아원 출신 제루샤 에버트라는 여학생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고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하는 익명의 키 큰 남자를 부르는 애칭이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에 출연한 유주혜, 김종구 ⓒ(주)엠피앤컴퍼니 제공

평범한 일상을 편지 형식으로 풀어내

이 작품은 저자인 진 웹스터의 간접 경험이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국의 대문호이자 미시시피 3부작으로 통칭되는 《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추억》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외조카다. 아버지 찰스 웹스터는 마크 트웨인과 출판 동업자이기도 했을 정도로 진 웹스터는 어려서부터 문학과 출판 업계의 지적이고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았다. 진보적인 학풍을 가진 배서(Vasser)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아 교내 신문기자로도 활동하며 학내·외 매체에 시, 소설, 수필을 발표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비행청소년 수용소나 고아원 등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고 실제로 처우 개선에 힘쓰기도 하며 이를 통해 사회사업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쓴 대표 작품으로는 《페티, 대학에 가다》(1903), 《키다리 아저씨》(1912), 《속 키다리 아저씨》(1915) 등이 있다.

그녀의 작품 특징은 순수한 소녀적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를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과 위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키다리 아저씨》는 저자의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린 최고의 대표작으로 주인공 제루샤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대학 4년 동안 자신의 일과와 생각에 대해 쓴 편지를 모은 형식의 ‘서간체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특징이 있다.

제루샤는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 많은 고아 소녀로서 뛰어난 영작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운영위원인 이름 모를 부자 아저씨가 그녀의 작문 실력에 감탄해 대학 경비 일체를 후원하게 된다. 후원의 대가는 오직 그 능력을 계속 연마해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후원자의 정체를 알려고 하지도 말고 감사 인사를 할 필요도 없으며 오직 그에게 학교생활을 자세히 적은 편지를 매달 보내는 일이었다.

오늘날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대표되는 개인의 통신환경이 구축되기 이전에 편지는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온 통신 수단이자 그 자체로 낭만적 글쓰기의 도구였다. 편지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쓰는 필자와 읽은 독자가 일대일 구도라는 점에서 치밀하고 개인적인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묘사가 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키다리 아저씨》 역시 제루샤가 4년 동안 한 사람의 구체적인 독자를 설정하고 그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자신의 모든 성장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기에 그것을 읽는 다른 독자들은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제루샤가 대학생활을 거치며 처음으로 남자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상황이 벌어지면서 흥미진진한 연애소설로 변모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주)엠피앤컴퍼니 제공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에 출연한 김경수, 장민제 ⓒ(주)엠피앤컴퍼니 제공

그리고 이처럼 특별한 한 소녀의 성장과 연애담을 편지 모음에 담은 이 소설을 현재 대학로에서 뮤지컬로도 만날 수 있다. 동명의 제목을 가진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다. 이 뮤지컬은 미국의 두 창작자 존 캐어드의 섬세한 극본과 폴 고든의 서정적인 음악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2009년 캘리포니아 초연을 거쳐,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초연해 꾸준히 시즌 공연을 가지며 스테디셀러가 됐다.

소설은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에서 보내는 1인칭 서간문으로만 이뤄져있지만, 무대는 제루샤와 키다리 아저씨(제르비스 펜들턴) 두 사람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제루샤가 보낸 편지는 편지를 쓰는 시점에는 제루샤가 읽으며 노래하지만 반대로 그 편지를 받는 시점에는 제르비스가 읽으며 노래하기도 한다. 다른 시간이지만 무대에서는 함께 듀엣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점은 소설과는 다른 무대에서만 가능한 ‘서간문 뮤지컬’ 기법이기도 하다. 4년의 시간은 편지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무대에서 빠르게 흘러간다.

대학생이 돼 지식을 쌓고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며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제루샤는 룸메이트인 줄리아의 젊은 삼촌 제르비스 펜들턴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은 문학, 여행, 여가를 통해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을 키다리 아저씨에게 실시간 중계하듯이 쓰는 제루샤의 솔직한 편지들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사랑의 파고를 맞는 한 여인의 매력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에 출연한 테이 ⓒ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에 출연한 테이 ⓒ(주)엠피앤컴퍼니 제공

2016년 국내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

무대는 크게 제루샤의 공간과 제르비스의 서재로 각자 나뉘어 있지만 극의 진행에 따라 다양한 장소로 변모하면서 소설과는 달리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만나는 장면도 연출된다. 물론 관객들은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이미 알지만 극 중 제루샤는 이를 모르기에 마지막까지 키다리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내려는 제루샤를 응원하게 되는 묘미도 생긴다.

제루샤 역에는 유주혜, 김려원, 장민제가 열연 중이다. 이 중 2019년에도 제루샤를 맡았던 유주혜는 베테랑 뮤지컬 배우로서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의 주인공 아샤 역의 더빙을 맡기도 했다.

제르비스 역에는 팬층이 두터운 세 배우 김종구, 테이, 김경수가 열연 중이다. 음악은 3인조(기타, 첼로, 피아노) 라이브 밴드 연주로 이뤄져있는데, 대부분의 솔로곡과 몇몇 듀엣곡의 차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규모 어쿠스틱 편성이라 단출한 2인극 무대와 잘 어울린다. 지난 연말에 개막한 이번 시즌 공연은 2월25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 극장에서 계속된다. 러닝타임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135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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