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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돌풍 일시적 현상 아니다”

백인 노동자 계층의 박탈감이 부른 ‘트럼프 현상’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13(Wed) 08:51:50 | 13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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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미국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워싱턴 덜레스공항 입국심사대의 출입국 관리는 나의 비자 유형을 보더니 “이제 한국은 잘사는 나라 아니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는데, 그 관리는 “왜 아직도 우리가 돈을 대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초청해야 되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국제방문리더십프로그램(IVLP)으로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1940년대에 시작된 미국 공공외교의 일환이다. 미국이 외국 사람들에게 자국 문물을 보여주고 네트워크를 맺음으로써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제 질서를 꾸려가고 장기적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한 수단이다. 한국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하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대꾸에 이 출입국 관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결국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왜 잘사는 나라 도와주나” 불만 늘어

 

2년 전 캐나다 기본소득 국제학술회의에서 만난 미국 민주당 성향 변호사 티머시 카터는 미·일 동맹이 이렇게 불평등하게 돼 있는지 처음 알았다고 했다. 동맹조약이 일본에 불평등하게 돼 있다는 뜻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본은 잘사는 나라인데 왜 우리가 군대를 보내서 지켜줘야 하느냐. 게다가 우리가 공격받으면 일본은 우리를 도와줄 의무도 없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당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과 헌법 개정 이슈가 보통의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진 때였다. 

 

이 일화들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사업가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 전의 일이다. 워싱턴에서 만나는 행정부·의회·싱크탱크 인사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장기적 국익은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다르게 작동하니 그런 목소리는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제도화된 의회-행정부-로비스트 주도의 정책 결정 과정은 어떠한 특이한 목소리도 결국 ‘일상적 정치(politics as usual)’의 용광로에 녹여서 없던 일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막상 집권 후에는 군산복합체의 반발에 직면해 공약을 철회한 사례가 많이 인용됐다.

 

하지만 트럼프의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을 앞둔 지금,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돼 오늘에 이른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는 미국 내에서부터 깨져나가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트럼프가 한 인터뷰에서 “골치 아픈 문제에 더 이상 엮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은 그런 정서를 대변한다.

 

‘자유 세계 질서(Liberal World Order)’라고 불리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는 평범한 미국인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관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관심에 의지해 유지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 무관심은 ‘좋았던 옛 시절’에나 적용될 수 있었다. 비자 유형에 괜한 시비를 걸었던 출입국 관리처럼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한 심리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쓰는 안보 비용 이외에도 무역자유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에 대한 반감으로도 표출되고 있다.

 

반(反)무역자유화 구호는 대선 때마다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양상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보와 보수에 관계없이 무역자유화를 공격하고 있다. 민주당이 최근 내놓은 정강정책(platform)에서 ‘지난 30년 동안 맺은 무역협정들은 종종 대기업들의 이윤을 상승시킨 반면 노동자들의 권리, 노동 기준, 환경, 공공보건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고 못 박으며 무역자유화 기조를 정면 비판한 것은 이러한 민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정서는 트럼프도 이른바 쇠락한 공장지대를 돌면서 자극한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분명히 반대하지 않는다며 공격한다.

 

 

트럼프, 샌더스 지지층 흡수 규모가 관건

 

반(反)이민 정서는 일자리 유출에 대한 반감처럼 특히 백인 노동계층에서 두드러진다. 사실 지난 몇 십 년간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것이 팍팍해졌지만 특히 백인 노동계층들은, 절대적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 하락했다고 믿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네오콘의 이데올로그 로버트 케이건 같은 엘리트들은 자유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아직도 미국이 지도적 역할을 할 여력이 있다고 설파한다. 이들의 입장에선 반무역자유화 정서뿐만 아니라 반이민 정서도 위험한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에 기반한 이들의 얘기는 이상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주의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논리는 이미 미국의 정치 과정 속에서 형성된 특수한 이해관계를 집약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이해관계 속에 군산복합체, 월가 금융자본 등 엘리트 계급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이미 미국 내에 충분한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 워싱턴 정치가 그러한 바닥 정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불만은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도 공유하는 정서다. 하지만 대다수 샌더스 지지자들은 그 불만이 이민자 혐오, 인종주의로 퇴행하는 것에서 멈칫한다. 본능보다 이성의 힘을 믿는 쪽이다.

 

젊은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트럼프보다는 샌더스에게 열광했다는 것이 그나마 미국 사회의 장래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닌가 한다. 지난 4개월간의 양당 경선이 끝난 뒤 터프츠대 연구팀이 30세 미만 유권자들의 표를 분석한 결과, 샌더스는 205만여 명의 표를 얻어 트럼프(82만)와 힐러리 클린턴(76만)의 표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밀레니얼 세대’로 이름 붙여진 이 세대는, 여론조사 전문가인 존 조그비에 따르면 이전 세대와 달리 미국 문화가 특별히 우월하다고 믿지 않으며, 야구보다 축구가 더 중요한 세대다. 고립주의 외교를 선호하지도 않으면서 조지 W 부시가 말한 ‘의지의 동맹’이라는 일방주의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은 세대이고, 사회주의라는 말에 대해 가장 거부감이 적은 세대이다. 국가안보국(NSA)의 도감청이나 낙태, 동성애, 마리화나 합법화 등에서 이전 세대보다 더 리버럴한 성향을 띤다.

 

이제 샌더스는 퇴장하고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결로 압축됐다. 샌더스 지지층의 대다수는 힐러리에게 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인종주의, 반이민 정서보다 세계화에 대한 노동자층의 불만에 호소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트럼프가 얼마나 샌더스 지지층을 가져가느냐가 본선의 판도를 좌우할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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