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④] 美, 북핵 검증·사찰 눈높이 낮추나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12 09:12
  • 호수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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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국무부, ‘CVID’에서 ‘FFVD’로 北 비핵화 원칙 수정

“우리가 무슨 패전국이냐? 차라리 우리 머리도 다 가져가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앞두고 열린 실무협상에서 북측 관계자가 미국 관계자에게 이 같은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미국에선 당시 비핵화 목표에 대해 ‘CVID’가 정설로 자리 잡았다. CVID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한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 of DPRK)를 의미했다. 미국은 정상회담 이전부터 합의문에 이 문구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은 기본적으로 ‘북한 비핵화’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전 한반도의 비핵화’ 차원에서 자신들도 비핵화에 동의하는 것이지 ‘북한’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문제는 ‘한반도(조선반도)의 비핵화(Denuclearization of Korean Peninsula)’로 정리됐다.

문제는 정상회담 이후에 불거졌다. 북한은 ‘검증 가능한(verifiable)’이라는 문구에도 “누가, 누구를, 어떻게, 검증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발했다. 미국도 “검증도 못 하는 것이 무슨 비핵화인가”라고 맞받아치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0월7일 평양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불가역적인 비핵화’ 지운 美

북한이 6·12 북·미 정상회담 이전 여러 차례 실무협상을 진행하면서 가장 반발한 대목은 바로 ‘불가역적인(irreversible)’이라는 용어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달성됐다고 할지라도 이미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한 기술이 있으니 이마저도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구체적으론 핵 폐기 후 핵·미사일 개발을 담당한 중요한 과학자들을 타국으로 이송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관련 기술을 모두 불능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으로선 사실상 수용 불가능하고 끝없는 ‘대북 불신의 표현’일 뿐이라고 맞섰다. 이러한 옥신각신이 6·12 북·미 정상회담 전날까지도 펼쳐졌다는 것이 대부분의 외교 소식통 전언이다. 결국 6·12 북·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은 ‘한(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로 봉합하는 수준으로 발표됐다.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논란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북한은 실무협상에서 미국이 ‘CVID’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특히 ‘불가역적인’이라는 말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현하며 미국에 불만을 표출했다.

미 국무부는 이후 북한 비핵화 원칙에 관해 ‘FFVD(최종적이고 충분하게 검증된 북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of the DPRK)’로 용어를 수정했다. 쉽게 말해 그동안 줄기차게 고집해 오던 ‘CVID’라는 용어가 이제는 ‘FFVD’로 바뀐 셈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바로 ‘불가역적인(irreversible)’이라는 용어가 빠졌다는 점이다. 북한이 그동안 가장 강력하게 반발해 온 ‘되돌릴 수 없는’이라는 용어는 공식 언급에서 사라졌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결과의 확정을 뜻하는 ‘완전하게 완성된(complete)’이라는 용어가 ‘최종적으로, 충분하게(final, fully)’로 바뀐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북한이 국제 사찰이나 검증 문제에 관해 “우리가 패전국이냐”며 주권 침해를 명분으로 강력하게 반발하는 점을 고려해 공식 용어를 수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이 보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검증과 사찰의 눈높이를 낮춰 북한과 협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셈이다.

물론 미국이 모든 것을 양보한 것은 아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나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 등은 브리핑에서 “이제는 ‘불가역적인(irreversible)’은 빠진 것이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포함한 용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소한 공식 석상에서는 용어 수정을 통해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국의 용어 수정에도 불구하고 북·미 협상은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정체 상태(standstill)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들은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와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 등 이른바 ‘선제 조치’를 취했지만 미국은 ‘종전선언’과 같은 ‘상응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무조건 ‘선(先) 비핵화’만 요구한다는 북한의 반발 때문이었다.


관건은 ‘검증 통한 최종적 비핵화’

이에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간 협상의 물꼬를 되살렸다. 취소됐던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재방북도 이뤄졌다. 다시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0월9일(현지 시각)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3〜4곳이 검토되고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만 개최 시기에 관해서는 “11월6일 중간선거 이후에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혀 11월 중순 이후에 열릴 가능성에 방점을 뒀다.

이에 관해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중간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재선을 목표로 하는 트럼프는 북한 문제 해결의 판(stage)을 더 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핵화 완료 시점이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만료(2021년 1월) 전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관건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북한 비핵화를 완료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미국 내 보수층의 눈높이도 맞추면서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비핵화 기준은 중요하다. 방북 후 미국으로 돌아온 폼페이오 장관은 “갈 길은 멀지만, 우리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됐다”면서 ‘FFVD’를 ‘궁극적인 목표’로 재차 강조했다. 비핵화 원칙에 관해 기준을 다소 낮추기는 했으나 검증을 통해 최종적인 비핵화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한 셈이다. 하지만 용어 하나하나에 대한 논란에서 보듯이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라는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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