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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살아날 수 있는 지혜에 대한 통찰

EBS 방송 개혁 선봉, 김유열 PD가 제시하는 지혜 《딜리트》

조창완 칼럼니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2.01(Sat) 16:00:00 | 15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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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배 속에, 북극곰의 배 속에, 알바트로스의 배 속에 플라스틱이 쌓여가고, 그 동물들은 죽어가고 있다. 차마 오래 볼 수 없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내가 회의시간에 마시고 버린 생수병과 습관처럼 쓰는 빨대 등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삼시세끼 후 닦는 치약에 들어간 미세 플라스틱 등도 강과 바다를 통해서 혹은 대기를 통해 우리의 몸속에 쌓이고 있다. 우리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이 우리 삶터는 죽어가고 있다. 잉여 생산과 과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시대에 대한 우려가 싹트고 있다. 이런 생각을 풀어줄 책이 출간됐다. 김유열 EBS PD가 내놓은 《딜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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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생산과 과소비를 미덕 삼는 시대에 우려

과잉의 시대에 비움과 폐허 속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폐허 전문’ PD를 자청하는 그의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어디서 무엇인가를 삭제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왜 삭제에서 답을 찾았을까. 그리고 삭제가 어떻게 새로운 창조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걸까. 그를 만나서 이 책이 담고 있는 의미에 접근해 봤다. 저자가 ‘딜리트’의 사상적 배경으로 소개한 것은 도가(道家)나 니힐리즘이다. 자본주의와 너무 멀게 보이는 이 철학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장(老莊)사상은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나옵니다. 니힐리즘의 철학자 니체도 20세기 초입이라는 혼돈의 시기에 나왔습니다. 신이 역사를 끌어가던 시기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오는 시기입니다. 이 시대의 주인은 물질이고, 그것이 발현된 것이 배금주의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더 느려야 하고 더 적어야 하고 더 협력해야 합니다. 노장이나 니체는 신을 빙자한 인간의 부패와 폐단을 삭제(딜리트·Delete)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그런 지혜가 당대에 새롭게 바꿀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딜리트》가 단지 성공을 위한 자기 계발서라는 데 저는 이견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정치적 제한을 넘어 철학·미학·건축·경제·미술·패션·기업·기획 등 전 분야에서 ‘딜리트’의 의미를 확인한 것입니다.”

노장이나 니힐리즘이 그를 딜리트로 이끌었다면, 그의 생각을 더욱 강고하게 한 사상가들도 있다. 데카르트나 마르크스다. 그는 모든 걸 의심하라는 명제를 지침으로 삼았다. “전 기획할 때 수없이 의심을 합니다. 현재의 현상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죠. 시청자도 의심해요. ‘제거하라’라는 말에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있죠. 마치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처럼 말이죠. 딜리터의 눈으로 바라보면 제거할 것이 너무 많아요. 데카르트와 같은 의심의 시선과 철학이 인류를 진보시켰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 회의는 그가 만든 다큐나 기획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바시르와 왈츠를(Vals Im Bashir)》이란 애니메이션 다큐영화를 봤다. 이스라엘 아리 폴만 감독이 1982년 레바논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이다.

“리얼함이 실사보다 더했어요. 그래서 EBS도 실험적인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시도했습니다. 일종의 딜리티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8년에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90분 전체를 애니메이션으로 《한반도의 공룡》이란 다큐를 기획해 방송하게 됩니다. 아무도 90분 내내 애니메이션으로 다큐를 할 생각을 하지 않을 때예요. 거기에 문제제기를 한 거죠. 딜리트한 거예요. 100살짜리 코끼리거북이 ‘재연 배우’로 등장하는 《마리온 이야기》도 같은 취지입니다. 국내 최초의 3D 입체 다큐 《신들의 땅 앙코르》도 EBS의 여건상 힘들었지만 제작했습니다. 과정·비용 등을 과감하게 딜리트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여행과 독서, 딜리트로 가는 근본적인 방법

지금은 EBS 다큐 프라임 제작 PD로 일하고 있는 김 PD는 2000년부터 시작된 EBS 편성 개혁의 키워드 중 하나였다. 평PD에서 방송사 개혁의 전사인 ‘편성기획부장’으로 파격 발탁돼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세 차례 이 보직을 맡으면서 어중간한 짜깁기 중심인 제작 구조를 어린이와 다큐멘터리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개편 후 프라임 타임 때 시청률이 600%나 급등해서, 성공적인 기업 변신의 코드로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방송사의 앞날은 넷플릭스·유튜브 같은 국제적 콘텐츠 유통 공간이나 제작환경에 위협받는 게 사실이다. 그는 어디서 그 출구를 찾을까?

“한국 방송사들은 답답합니다. 유튜브가 대세라니 모바일 콘텐츠에 몰립니다. 답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부서가 만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저는 지상파 TV가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기를 포기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각사에 맞는 대형 콘텐츠에 집중해서 동아시아 시장에서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1999년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가 공전의 히트를 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어요. 하지만 성공 경험이 때로는 더 혁명을 막고 있죠. 모든 콘텐츠가 아니라 남들이 감동할 만큼 탁월한 콘텐츠에 집중해야죠. 드라마 최강자가 되고 싶으면 다른 것은 약화해야 합니다. 예능에 최강자가 되고 싶으면 다른 것을 딜리트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딜리트에 익숙하지 않은 민족이라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교조(敎條)의 나라, 원리주의 나라 같아요. 딜리트가 참 어려운 나라죠.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 모두 교조주의 때문에 변화에 실패했다고 봅니다. 방송계도 나라의 축소판입니다. 가장 창의적인 집단도 도그마에 빠져 있죠. 전 분권주의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CEO가 모든 걸 결정하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다큐 프라임을 출범할 때 당시 사장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최소한 1년간 소신껏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요. 사장은 여러 불협화음에도 그것을 지켜줬죠. 소신껏 하려는 자가 많아져야 하고, 소신을 허용하는 CEO도 많아져야 가능할 겁니다.”

그는 책에서 여행과 독서를 딜리트로 가는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여행을 가면 기존의 생각과 새로운 생각이 충돌하게 돼 있습니다. 여행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죠. 책은 훨씬 저렴하게 지혜를 여행하는 방법입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무수한 기존 사실과 충돌합니다. 타인의 책으로 난 무너지기도 하고 보강되기도 합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책을 만나면 행복이죠. 이런 책이 날 딜리터로 만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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