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교민 사망…석연찮은 ‘로마법’에 유족 억장 무너져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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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멕시코·인도네시아에서 연이어 의문사 발생
타살 정황 무시하는 현지 당국…"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주권 침해 못해 외교력 발휘 제한적, 반복될 수 있는 억울함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외국에 가면 그곳의 법과 문화, 관습 등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흔히 쓰이는 격언이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우리 교민 사망 사건 앞에서 이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주로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자국 주권(主權)'이란 이유로 행해지는 석연찮은 행정 탓에 국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섬에서 몸 곳곳이 흉기에 찔린 채 숨진 오모(남·54세)의 유족이 만든 전단지. 인도네시아 경찰 당국의 석연찮은 수사 과정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우리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 'SBS 8시 뉴스' 방송 화면 캡처
최근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섬에서 몸 곳곳이 흉기에 찔린 채 숨진 오아무개(남·54세)씨의 유족이 만든 전단지. 인도네시아 경찰 당국의 석연찮은 수사 과정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우리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 'SBS 8시 뉴스' 방송 화면 캡처

 

멕시코, 인도네시아 교민 의문사에 비상 걸린 외교당국

2월14일 외교부에 따르면, 주(駐)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은 최근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섬에서 우리 교민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영사 조력을 펼치고 있다. 영사 조력이란 교민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 또는 재산상 중대한 손해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클 때 국가가 발 벗고 구제에 나서는 것을 말한다. 이번 일을 놓고 점점 더 증폭돼가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외교당국은 가용 외교 수단을 총동원하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 멕시코에서 교민 한 명이 의문사한 사건까지 겹쳐 그야말로 비상이다.   

한국 발전업체와 인도네시아 전력기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현지 특수목적법인(SPC)에 파견돼 2017년부터 근무 중이던 한국인 오아무개(남·54세)씨는 1월21일 한 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욕실에서 전깃줄로 목이 매달렸고, 몸 곳곳을 흉기에 찔린 상태였다. 오씨 침대 위엔 피 묻은 흉기 두 점이 방치돼 있었다. 사건 현장의 뒷문은 열려 있었으며, 역시 피로 얼룩진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이었던 오씨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유족은 물론 주변 이웃들도 피살 가능성을 강하게 거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 부검 결과를 토대로 오씨 사인(死因)을 질식사로 일단 추정했다. 

구체적인 부검·현장 감식 결과 등을 바탕으로 한 공식 수사 내용 발표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재완 외교부 해외안전관리기획관(국장)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우리 영사를 사건 현장에 3번 급파하고 총영사뿐 아니라 대사까지 나서 현지 경찰 당국과 접촉했다. (공식 수사 결과 발표 때까지) 공정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수사해 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다"며 "인도네시아 경찰청 측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설명이지만, 오씨 유족은 '인도네시아 경찰을 믿지 못하겠다' '우리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인터넷상에서도 '타살 정황이 확실하다' '인도네시아는 우범 지역이라 강력사건 발생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 정부가 현지 당국의 수사에 개입해야 한다'는 등 반응이 뒤따랐다.        

 

"못 믿을 나라, 못 믿을 행정도 많은데…"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로서는 이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태다. 우선 외국 영토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선 수사권 자체가 없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를 통해 인도네시아 경찰 당국에 공조 수사를 요청했으나, 진즉에 거절당했다. 영사 조력도 해당국 법을 준수하며 제공하게 돼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주재국의 주권을 넘어서는 대응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같은 논란은 불과 보름여 시차를 두고 발생한 멕시코 교민 사망 사건에서도 그대로 벌어졌다. 멕시코 몬테레이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교민 김아무개(남·35세)씨는 1월3일 오전 0시쯤 한국인 지인 2명과 시비가 붙어 몸싸움을 벌이다 숨졌다. 앞서 함께 1, 2차에 걸쳐 술자리를 가지고 3차로 노래방에 온 때였다. 멕시코 현지 부검의는 부검 결과 '외상(外傷)은 없으며 뇌출혈에 의한 자연사'라고 결론 내렸다.

멕시코 몬테레이시에서 지인과의 몸싸움 끝에 사망한 교민 김모(남·35세)씨의 아내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청원글. 멕시코 현지 당국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이 '자연사'로 나온 것 등에 문제 제기하는 한편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대응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월22일 시작돼 2월21일 마감되는 청원에는 2월14일 오후 5시 현재까지 2만672명이 참여했다.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멕시코 몬테레이시에서 지인들과의 몸싸움 끝에 사망한 교민 김아무개(남·35세)씨의 아내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청원글. 멕시코 현지 당국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이 '자연사'로 나온 것 등에 문제 제기하는 한편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조력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월22일 시작돼 2월21일 마감되는 청원에는 2월14일 오후 5시 현재까지 2만672명이 참여했다.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김씨 유족은 몸싸움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주장하며 부검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다. 실제로 노래방 폐쇄회로(CC)TV를 통해 김씨가 폭행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돼 있었다. 유족 측 요구에 따라 김씨 시신은 한국으로 보내졌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1월21일 재부검했다. 국과수는 숨진 김씨의 신체 곳곳에서 외상 흔적을 발견했다. 멕시코 부검의의 소견과 배치된다. 

더군다나 넘어온 김씨 시신에선 뇌·심장·위가 없었다. 멕시코 당국이 안 보낸 것이다. 유족 측은 "뇌혈관 문제를 들어 자연사로 판단해놓고 정작 뇌를 보내지 않았다"라며 "(멕시코 현지에서 고용한) 변호사에게 '(멕시코에서는) 돈을 주면 부검이나 수사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지'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가능하다'고 하더라. 어느 누가 이 나라 부검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국과수 부검의를 멕시코에 파견해보려 했다가 현지 당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유족 측의 재수사 요청도 일축됐다. 해당국의 주권 행사 앞에선 어떤 반전도 일으킬 수 없었다. 다만 멕시코 당국은 김씨의 뇌·심장·위 등 잔여 시신을 한국에 송환하는 선에서 사건 처리를 일단락지었다. 국과수는 2월1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잔여 시신을 인도받아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잔여 시신의 손상 가능성, 타살 여부 판단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사인을 뚜렷이 밝힌다고 해도 우리 정부가 멕시코 당국에 재수사를 요청하거나, 국제형사재판소(ICC)로 사건을 넘기는 등 추가 대응에 나설지는 불투명하다.  

 

"해당국 법 준수" vs "보다 적극적인 외교 대응 필요"    

한편, 지난해 12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영사조력법'이 통과됐다. 강석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해당 법에 관해 "우리 헌법은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아직 재외국민 보호에 관한 법률이 마련돼 있지 않아 관련 영사 업무가 행정규칙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등 재외국민이 해외에서 사건·사고 등 위급한 상황에 부닥칠 때를 대비한 적절한 보호 체계가 정립돼 있지 못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에 제정안은 해외 위난상황 등 각종 사건·사고로부터 재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재외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국외 활동을 보장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 4개 장,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은 형사 절차, 범죄 피해, 사망 등 6개 유형별 재외국민에 대한 영사 조력의 내용, 외교부 장관 소속 재외국민보호위원회 설치 및 재외국민보호기본계획 수립 등을 규정하고 있다. 부칙에 따라 공포일(1월15일) 후 2년이 지난 2021년 1월16일부터 시행된다. 법이 시행되면 영사 업무에 대한 외교관들의 책임감이 높아지고 재외국민 보호 인프라 개선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 신설된 법이 이번 인도네시아, 멕시코 교민 의문사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비슷한 경우의 재발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영사 조력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 및 주재국 법령을 준수해 제공돼야 한다'는 외교의 기본원칙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교민들이 특히 우려하고,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일부 국가에 대한 영사 업무에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은 SNS를 통해 멕시코 교민 사망 사건을 언급하며 "이런 사건에 대해서야말로 정부가 외교적으로 최선을 다해 도움이 돼야 한다. 힘없는 나라 국민이기 때문에 응당 누려야 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아서야 되겠나"라면서 "싸움이나 사망 자체는 사적 영역에서 벌어진 결과라 하더라도 최소한 장기가 적출된 상태에서 시신을 송환한 (멕시코 현지) 병원 측 처사에는 문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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