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보는 북한과 미국의 상반된 시각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5 08:00
  • 호수 15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美 “집단지도체제 도입 경제개혁” vs 北 “美와 전쟁 승리한 공산주의 우방”

북·미 양국 정상이 2월말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회담지로 베트남이 공개된 것은 2월5일 미 연방의사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다. 의회 연설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주요 방송 아나운서들과 가진 오찬에서 “2월말 베트남에서 북한과 2차 회담을 열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회담장이 어딜지는 그때까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주요 외신들은 휴양지 다낭이 유력한 것으로 봤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하노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사전 협상차 평양에 다녀온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로부터 내용을 보고받은 뒤, 2월8일(현지 시각)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월27~28일 하노이에서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 만남을 갖기로 합의했다. 나는 김 국무위원장과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당초 미국 등 서방 주요 언론들은 북한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원산 갈마해안지구와 다낭의 입지여건이 비슷한 점, 외부 관광객과 분리된 공간을 회담장으로 쓸 수 있어 경호에 용이하다는 점, 베트남전쟁 당시 다낭 일대가 미군 주둔지로 쓰인 점 등의 이유로 다낭이 유력할 것으로 봤다. 

다낭을 뒤집고 하노이가 최종 회담지로 결정된 것은 북한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노이엔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이 있어 협상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는 2월9일 한국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북한은 매번 자국 대사관이 있는 도시에서만 회담을 가져왔다”면서 하노이를 회담장소로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은 자국 대사관과 가까운 곳에서 회담을 열어야만 평양과 긴밀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이는 여전히 북한의 정치 구조가 폐쇄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오른쪽)과 호찌민 베트남 주석이 1958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오른쪽)과 호찌민 베트남 주석이 1958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北, 늘 자국 대사관 있는 도시서 회담

미국 언론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리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양보가 있었다고 본다. CNN은 2월10일 보도에서 “이번 장소 결정은 미국에 의한 ‘작은 양보(Small concession)’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외교소식통은 “미국 측이 이미 다낭에서 회담이 열릴 것을 감안해 회담장 주변을 모조리 체크한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하노이 개최로 판을 흔들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CNN도 협상팀 관계자의 말을 빌려 “미국 측이 201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담이 열렸던 다낭을 고려했다는 것은 회담장과 관련해 모든 확인 절차를 끝마쳤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회담장을 양보함으로써 미국은 북한에 좀 더 양보를 요구했을 수 있다. 회담지를 어디로 정하느냐는 미국보다 북한에 더 중요한 과제다. 이와 관련해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비건 특별대표의 평양 방문을 통해 미국은 제재 완화 대신 종전선언과 평양 연락사무소 설치 등 체제 보장 조치를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제재 완화는 그동안 북한이 미국에 강력하게 요구해 온 사안이다. 하지만 부분적이라도 제재를 풀어줄 경우 다시 고삐를 쥘 수 있어 미국 내에서도 비핵화 협상 카드로 이견을 보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제재 완화 카드를 철회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종전선언은 법적 효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 연락사무소 역시 정식 국교수립 전 단계이므로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폐쇄할 수 있다. 

베트남이 회담지로 결정된 데는 미국과 북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베트남은 과거 미국과 맞서 싸워 승리한 바 있다. 더군다나 수도 하노이는 프랑스·일본 등과 결전을 벌인 독립전쟁 중심지였다. 또,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과거 찾았던 곳을 반세기 만에 다시 방문한다는 상징성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하노이는 김정은에게 베트남 지도자들과의 별도 양자회담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해 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입장에선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개혁·개방의 상징이다. 과거엔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지만, 지금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 되레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에 적극 활용되고 있는 전략지다. 미국으로선 ‘비핵화와 개혁·개방만 하면 베트남처럼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다. 1986년 도이모이(Doi Moi·쇄신) 정책을 채택한 지 9년 뒤인 1995년 베트남은 미국과 국교를 체결했다. 6년 뒤인 2001년엔 미국과 무역협정까지 체결했으며 2007년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8일 트위터를 통해 하노이 회담 개최를 발표하면서 “북한은 김정은의 지도력 아래 대단한 경제 강국(Great Economic Powerhouse)이 될 것이다. (중략) 북한은 다른 종류의 로켓이 될 것-경제적인 로켓!(a different kind of Rocket-an Economic one)”이라고 말해 비핵화만 결정하면 강력한 경제지원 정책을 펼 것을 예고했다. 경우에 따라선 베트남과의 관계 회복 시간보다 더 빨라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베트남식 경제모델이 북한에 이식시키기 가장 쉬운 구조다.   


베트남, 레주언 철권통치 끝내고 개혁·개방

베트남이 개혁·개방 정책을 결정하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앞서 설명한 대로 베트남은 1986년부터 ‘도이모이 정책’을 폈다. 한마디로 풀이하면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이 권력을 틀어쥐되 경제는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베트남이 도이모이 정책을 편 것은 아니다. 관련 정책이 시작된 1986년은 국부 호찌민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레주언이 사망한 해다. 레주언은 호찌민 사망 후 베트남을 이끌어 1976년 베트남의 공산화를 달성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초대 서기장에 취임했다. 공산당 내에서도 강성 레닌주의자였다 보니 레주언 살아생전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레주언의 사망은 레닌주의식 철권통치의 종말을 예고했다. 베트남 전문가인 리홍립 ‘ISEAS-유스프 이삭 연구소’ 연구원은 “레주언이 죽고 난 뒤 단 한 명의 정치인도 예전과 같은 권력을 가질 순 없었으며 이를 대신해 공산당 정치국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다”고 분석했다. 단일지도체제 아래서는 강력한 개혁·개방 정책이 실행되기 힘들다는 것을 베트남이 잘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백두혈통을 중시하는 북한 입장에선 가장 듣기 싫은 소리일 수 있다. 물론 강력한 철권통치에 기반을 둔 김정은 체제가 베트남의 전철을 밟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는 배경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