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아버지 시중쉰, 마오 미움 샀던 개혁·개방주의자
  •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7 14:00
  • 호수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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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중국 이야기] 중국 주자파(走資派) 연구(2)

중국 사람들은 덩샤오핑(鄧小平)을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자’라고 부른다. 1966년부터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대륙은 마오가 주동한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동란(動亂)’, 이 정치적 동란 때문에 일체의 경제활동이 중단됨으로써 빚어진 4000여만 명의 아사자들 때문에 어둠과 죽음 그리고 공포에 묻혀 있었다. 

마오가 83세로 죽자 권력은 화궈펑(華國鋒)이라는 당시 55세의 ‘사람 좋은 젊은이’에게 넘어갔다. 마오가 죽기 전에 어느 공개 석상에서 화궈펑을 향해 “당신이 일을 하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한 데 따른 것이었다. 화궈펑은 당 주석과 당 중앙군사위 주석, 국무원 총리 자리에 앉아 당·정·군의 최고위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권력 중심은 이미 72세의 덩샤오핑으로 이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화궈펑은 자신의 시정 방침을 “두 개의 범시(兩個凡事)론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두 개의 범시’란 “마오가 죽기 전에 내린 결정과 지시는 무엇이든지 옳다”는 뜻으로 김일성 사후의 북한식으로 말한다면 “유훈통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자로 불린 덩샤오핑 ⓒ 연합뉴스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자로 불린 덩샤오핑 ⓒ 연합뉴스

대장정 끝 혁명기지 마련해 준 시중쉰

마오가 죽은 2년 뒤의 겨울, 1978년 12월 하순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 개혁·개방의 시대인 지금 중국에서 이른바 ‘11기 3중전회’라고 노래처럼 부르는 그 회의는 당 주석인 화궈펑이 아니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자리를 장악한 덩샤오핑의 주도로 진행됐다. 회의 결론도 ‘사상해방(思想解放)과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요점이었다. 풀어서 말하면 “마오가 생전에 내린 결정과 지시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 나가겠다는 화궈펑의 생각은 틀린 것이며, 이미 세상을 떠난 마오의 사상에서 중국공산당은 해방돼야 하고, 마오가 생전에 내린 지시와 결론에 따를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덩샤오핑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북한의 조선노동당과는 궤도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터였다. 

개혁·개방 시대의 중국공산당을 총지휘하는 당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의 3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마오보다는 20년 아래, 덩샤오핑보다는 9년 연하로 1913년생이다. 중국 서부 황토고원 지대의 산시(陝西)성 출신이다. 중국공산당 권력의 견해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중국 관영 검색엔진 바이두(百度)는 시중쉰이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였으며, 당과 군의 탁월한 정치공작 지도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옌안(延安)의 혁명근거지를 만들어낸 위대한 공산주의 전사(戰士)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 홍군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패전 위기에 몰려 중국 남부에서 서쪽으로, 또 북상해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겨우 은신할 수 있는 근거지를 찾은 대장정(大長征) 끝에 옌안의 혁명기지를 마련해 준 사람이 현지 출신의 시중쉰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촌 출신으로 현실주의자였던 시중쉰과 마오의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다. 1935년 10월 2만5000리 대장정 끝에 산시성에 도착한 마오의 홍군은 옌안의 마을 담벼락과 큰 나무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에서 ‘산시(陝西)간쑤(甘肅) 소비에트 정부 주석 시중쉰’이라는 글귀를 보게 됐다. 그리고 마오 앞에 나타난 현지 지도자 시중쉰은 불과 22세의 젊은이였다. 당시 마오는 42세였다. 마흔을 넘겨 이미 말 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마오 앞에 나타난 22세의 황토고원 시골 지도자 시중쉰의 말 또한 맹랑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장정을 거쳐 여기 산시 북부에 도착하기 전에 이 지역은 국민당 군대의 공산당 근거지 말살 작전과 내부적인 좌경적 노선의 피해를 입어 수많은 우수 공산당원과 간부, 지식분자와 하급 지휘관들이 총살과 생매장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2018년 중국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새 단장한 선전시 서커우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광둥성 당서기였던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의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중국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새 단장한 선전시 서커우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광둥성 당서기였던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의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시중쉰을 향한 마오의 불편한 속마음

‘좌경적 착오’라니.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 홍군이 ‘좌경적 착오’에 빠져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에 궤멸당해 패주해 여기 산시성 북부의 황토고원 산골까지 쫓겨 오지 않았느냐는 당돌한 평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죽을 고생을 하며 중국 남부의 험악한 산악지대와 중국 서부의 해발 4000m가 넘는 설산, 섭씨 40도가 넘는 늪지대를 통과해서 옌안에 도착했다. 당초 8만 명이 넘던 병력 가운데 대부분 죽고 도망해서 10분의 1에 불과한 8000여 명만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마오는 불편한 속마음을 감추고 시중쉰을 산시성 지방 당직에서 중앙 당직으로 옮겨 승진시키는 인사를 잇달아 했다. 시중쉰은 그런 마오의 불편한 마음도 모르고 1945년 6월 중국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후보 중앙위원에 오르고, 두 달 뒤인 8월에는 당 중앙 조직부 부부장이라는 보직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그해 8월 일본 군국주의가 미국에 패전하고 중국공산당은 항일 전투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당 지휘부가 옌안을 떠날 때 마오는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당의 서북국(西北局) 담당 서기로 젊은이를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됐어. 바로 시중쉰 동지인데, 그는 이 지역 군중들의 리더야. 군중들 속에서 달려 나온 군중의 영수(領袖)란 말이야.”

물론 마오가 말한 “군중의 리더”라는 말은 비꼬는 말이었다. 나중에 그 말뜻을 깨달은 시중쉰은 평생 자신이 마오의 ‘도하유인(刀下留人)’ 상태에 있었다는 말을 했다. 마오가 죽이려고 했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칼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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