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로 공허한 마음 달랜 러시아의 두 여제(女帝)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0 15:00
  • 호수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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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④] 정치적으로 성공한 시어머니 엘리자베타와 며느리 예카테리나의 도자기 애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176개 바로크 양식 조각상으로 지붕을, 로코코 양식으로 외관을 꾸민 겨울궁전이다. 이 궁전은 엘리자베타 여제(Yelizaveta Petrovna·1709~1761)의 요청으로 1754년에 짓기 시작해 1762년 완성했다. 

에메랄드색 3층 건물, 400개 방(1050개 전시실)에는 총 300만 점의 회화, 조각, 도자기 등 작품이 전시돼 있다. 회화 전시실에는 고갱과 고흐, 세잔과 르누아르, 드라크르와, 마네와 모네, 마티스 등의 명작들이 계속 이어진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눈의 성찬(盛饌)이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대리석 기둥, 청금석과 공작석의 화려한 세공도 눈을 아찔하게 만든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라파엘 회랑 ⓒ 조용준 제공

루브르, 영국박물관과 함께 3대 박물관으로 불리지만, 에르미타주가 진정한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루브르와 영국박물관은 제국시대의 침략과 약탈로 모은 문화유산이지만, 에르미타주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귀족들이 수집한 소장품들로 전시품목을 이뤘으므로 품격이 다르다는 시각이다. 

사실 오늘날의 에르미타주는 박물관은커녕 변변한 갤러리 하나 없는 현실을 개탄한 예카테리나 여제(Ekaterina II·1729~1796)가 기존 황실 소장 미술품에다 바깥의 걸작들을 열심히 구입해 보탠 데서 출발했다. 특히 1764년 독일의 부유한 상인 요한 고츠코스키(Johann Gotzkowski)로부터 225점의 그림을 구입한 것이 큰 밑바탕이 됐다. 

요한 고츠코스키는 평소 프랑스 그림 구입에 열심이었던 프로이센 프레드릭 2세의 미술품 수집 대리인이어서 상당한 그림을 수집해 보관해 놓고 있었는데, 프랑스-오스트리아와의 7년 전쟁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프레드릭 2세가 그림 구입을 포기하자 대신 러시아로 발을 돌려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구매를 의뢰했다. 여제는 크게 기뻐하며 기꺼이 그림을 구입했다. 이 때문에 엄청난 국고 손실이 있었지만, 한 가지 다행이었던 사실은 요한이 실력 좋은 미술품 감정 전문가가 아니어서 17세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걸작들을 상당수 넘겼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1764년은 에르미타주가 공식 출범한 연도가 됐다.

프로이센 황제가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보낸 대형 테이블 장식 도자기 ⓒ 조용준 제공 
(왼쪽)예카테리나 여제 피겨린(1744년 독일 마이슨 제작) (오른쪽)엘리자베타 여제를 묘사한 피겨린(18세기 독일 제작) ⓒ 조용준 제공

표트르 대제의 딸 ‘풍운의 여장부’ 엘리자베타 여제

1772년 프로이센의 프레드릭 2세는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러시아-터키(튀르크) 전쟁(1768~1774)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초대형 디저트 서비스를 선물로 보낸다. 만찬 식탁 중앙에 놓이는 장식 용도다. 

이 장식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백자로 만든 신(神)들의 호위를 받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중앙 높은 곳에 앉아 있고, 그 주변에 갖가지 민속 복장의 터키인들이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와 터키는 156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15번이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그만큼 사사건건 대립했던 숙적이라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남하 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 터키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2~3년 안에 끝나는 전쟁들이었지만, 예카테리나 여제 때의 전쟁은 6년 동안 이어진 큰 전쟁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제 당시 러시아는 크고 작은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의 강국으로 위치를 다졌다. 프로이센 황제가 선물을 보낼 정도니 이때의 러시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위의 디저트 서비스는 전쟁이 끝나기 한참 전인 1770년부터 1772년까지 베를린 로열 포슬린 공장에서 만들었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할 것을 대비해 미리 만들어놓고 준비한 셈이다. 그 정도로 러시아 영향력이 막강했던 시절이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은 베를린 로열 포슬린 공장의 프리드리히 엘리아스 메르(Friedrich Elias Meyer)와 빌헬름 크리스티안 메르(Wilhelm Christian Meyer) 형제였다. 이들이 튀르크 사람들을 묘사한 피겨린은 너무나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당시 독일의 도자기 기술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형 프리드리히는 나중에 마이슨 도자기에서도 뛰어난 피겨린 제품을 만들었다

1776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세브르(Sèvres)의 로열 포슬린에게 디너와 디저트 서비스를 주문했다. 거의 800개에 달하는 이 서비스에는 288개의 플레이트가 포함돼 있었다. 접시를 보면 중앙에 꽃으로 만든 이니셜 ‘E’자가 있고, 글자 사이에 금박 로마자로 ‘Ⅱ’자가 있다. ‘E’자는 예카테리나(Ekaterina)를 뜻하고, ‘Ⅱ’자는 2세를 뜻하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여제를 위해 1785년 중국에서 만든 접시 ⓒ 조용준 제공

이 서비스는 도자기에 대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사실 그녀는 광적인 도자기 수집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자기를 통해 분출된 그녀의 사치는 남편과 관계가 있다. 

프로이센 귀족의 딸인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Sophie Friederike Auguste), 즉 나중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열다섯 살이 되던 1744년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한다. 여제의 조카로 황위를 이을 카를 울리히(Karl Peter Ulrich·1728~1762), 즉 표트르 3세와의 결혼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후계자를 정해 빨리 결혼시켜야 할 입장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는 ‘풍운의 여장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엘리자베타와 며느리 예카테리나는 격동의 정치판을 헤쳐 나가 마침내 황제의 관을 머리에 쓰는 삶이 묘하게 닮아 있다. 

그 모든 것은 1725년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는 바람에 러시아가 주인 없는 나라로 혼란에 빠진 데서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아들 다섯과 딸 일곱 명을 두었지만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고 딸 안나(Anna)와 엘리자베타만 남았다. 표트르 대제가 사망할 당시 언니인 안나는 홀슈타인 고토르프 공작과 결혼한 상태였고, 오직 엘리자베타만 남은 상황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엘리자베타를 프랑스 루이 15세와 결혼시킬 작정이었지만, 부르봉 왕가가 몰락하면서 이 계획도 없던 일이 됐다. 

그리하여 엘리자베타가 유일한 후계자 자격이 있었지만 반대파는 생각이 달랐고, 엘리자베타는 겨우 15살 어린 나이라 권력 투쟁에 나설 수도 없었다. 엘리자베타는 이후 16년 동안 경쟁자들이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어머니(예카테리나 1세)가, 다음엔 조카가, 그다음엔 낯선 사촌이 왕관을 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다들 병에 걸려 일찍 죽었다. 마지막으로 너무 먼 친척이라 표트르 대제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두 달짜리 간난 아기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회가 왔다.

선물로 보내온 서비스에 속한 피겨린들 ⓒ 조용준 제공 

친위 쿠데타로 남편 폐위시킨 예카테리나 여제

엘리자베타는 1741년 11월25일 아버지에게 충성을 바쳤던 근위병들과 함께 왕궁을 점령하고 32살에 비로소 여황제로서 왕관을 썼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엘리자베타는 독일 태생의 조카 카를  울리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14살 때 이모 엘리자베타 여제의 부름에 따라 러시아로 왔지만, 문제가 있었다. 조카는 어리석고 모자랐으며, 정서적으로 유치한 인물이어서 러시아를 물려받을 그릇이 아니었다.

결혼을 서두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로마노프 왕가를 이어가려면 아무래도 믿을 만한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하므로 조카를 똘똘한 며느리와 일찍 결혼시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후계자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대상이 바로 15살 독일 출신의 귀족 소피였던 것이다.  

엘리자베타의 어린 시절처럼 매우 총명했던 소피는 자신이 시험대에 올라섰고, 그것이 큰 기회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소피는 러시아에 오자마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엘리자베타의 어머니 이름인 ‘예카테리나’로 바꿨다. 사실상 시어머니가 좋아할 예쁜 짓만 골라서 한 것이다.

그렇게 러시아를 대표할 황후 수업을 열심히 쌓는 예카테리나였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불행하기만 했다. 첫날밤에도 신랑은 병정놀이를 해서 합방은 꿈도 꾸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도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아 후계자 생산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결혼하고 8년이 지나서야 예카테리나는 남편이 아닌, 귀족 출신의 법관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Saltykov)에게 순결을 바쳤다. 로마노프 혈통을 기대하는 엘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간통이라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간통보다도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게 더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54년 마침내 예카테리나는 아들 파페르(Paul)를 낳아 엘리자베타 여제가 원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는 아들을 낳은 예카테리나의 권력투쟁이 시작됐다. 1761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표트르 3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러시아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잔인했으므로 귀족과 군부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1762년 봄 황제 자리에 올라 여름에 폐위됐다. 자신의 부인인 예카테리나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 때문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정부인 대위 그레고리 오를로프(Gregory Orlov) 등 군부의 도움으로 남편을 황제 지위에서 끌어내렸다. 표트르 3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9km 떨어진 로프샤(Ropsha)라는 곳으로 끌려가서 죽었다. 불과 34세였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표트르 대제를 존경한 그녀는 시할아버지의 전통을 잇고자 노력했고, 이에 걸맞은 통치를 했다. 이렇게 러시아는 엘리자베타 여제와 예카테리나 여제로 이어지는 기간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여성스러운 외형의 예카테리나 여제 여름궁전 입구 ⓒ 조용준 제공

권력 잡은 뒤 테이블웨어 원 없이 주문

시어머니 엘리자베타와 며느리 예카테리나는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행복과 평화는 얻지 못했다. 그런 심경의 허전함을 채워준 것이 바로 도자기였다. 엘리자베타는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3년이 지난 1744년 러시아 최초의 왕립 도자기 회사인 러시아 황실 도자기(Imperial Porcelain Manufactory), 일명 로마소노프(Lomosonov) 도자기를 만들었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이 도자기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745년 소피(예카테리나 여제)는 자신과 카를 울리히(표트르 3세)의 결혼선물로 마이슨 도자기를 탄생시킨 작센(Sachsen) 공국의 아우구스트 3세로부터 마이슨 도자기 세트를 받았다. 작센과 러시아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한 이 도자기 세트에는 화려한 테이블웨어와 다량의 피겨린들이 포함돼 있었고 이는 순식간에 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피가 비록 귀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지방의 영세한 귀족이었기에 그렇게 눈부신 도자기들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중에 권력을 잡은 예카테리나 여제는 마이슨과 세브르, 로열 코펜하겐 등 당대 최고의 도자기 회사들에 자신을 위한 대량의 테이블웨어를 원 없이 주문했다. 특히 마이슨 도자기에는 40개의 피겨린을 특별 주문했는데, 이들 피겨린 제작은 1772년부터 177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진행됐다. 제작은 마이슨의 전설 요한 켄들러(Johann Joachim Kändler)와 또 다른 디자이너 미셀 아시에(Michel Victor Acier)가 맡았다.

예카테리나 여제의애완견 ‘리제타’ 피겨린(1766년 마이슨 제작) ⓒ 조용준 제공

예카테리나는 1766년 그녀의 애완견인 ‘리제타(Lisetta)’ 모양의 피겨린 특별제작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녀는 피겨린이 리제타와 비슷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리제타를 그린 초상화를 마이슨 도자기에 직접 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피겨린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황실과 귀족들의 별장 지역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ye Selo), 즉 오늘날 푸시킨시의 여름궁전(일명 예카테리나 궁전)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이 궁전은 예카테리나의 시할머니 즉, 표트르 대제 부인인 예카테리나 1세가 황실 별장 지대에 짓게 한 왕궁이었으나, ‘오직 그녀 자신만을 위한’ 여름별궁을 원했던 소피의 바람대로 동양 도자기들을 수집해 진열한 ‘중국 궁전’으로 바뀌었다. 예카테리나의 도자기 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왕실과 귀족들의 단순한 호사 취미를 넘어, 스스로를 위무하고 치유하는 행위였다. 비록 권력은 얻었지만 남편과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그 남편을 권좌에서 끌어내렸으며 결국은 목숨을 잃게 한 ‘어두운 과거’로부터의 도피, 끝없이 밀려오는 허망함을 도자기를 통해 위로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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