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이권 위해 기형적으로 만들어진 ‘슬픈 땅’의 시련
  • 오은경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0 10:00
  • 호수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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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흐’ 차지하기 위한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교전영토 분쟁 속에 녹아 있는 종교·민족·역사 전쟁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기고]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 -Karabakh)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분쟁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아제르바이잔의 제2 도시 간자(Gnc)에까지 폭격이 이뤄졌고, 열흘이 되도록 사태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부상자를 포함한 수천 명의 양국 인명 피해가 보도되고 있어, 보다 못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내 민스크그룹(나고르노 카라바흐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 의장국인 러시아·프랑스·미국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양측 모두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우리 땅”이라는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표방하며 종교와 문화적 공감대가 있는 서구인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와 아르메니아 민족의 뿌리가 나고르노 카라바흐(이하 카르바흐) 땅에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역사 복원이라는 숭고한 민족적  과업으로 전쟁을 미화하기도 한다. 카라바흐가 아르메니아인에게 그토록 중요한 민족적 성지(聖地)라면, 어떤 이유로 지금 국제법상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영토가 된 것일까? 그리고 국제법상 명백히 아제르바이잔 영토인 카라바흐에 현재 80% 이상이 아르메니아인들로 채워진 원인은 무엇일까?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이 풀리지 않는 이 불행하고 비극적인 분쟁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라바흐는 25만~30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턱뼈가 발견됐을 정도로 인류 문명의 역사가 오랜 곳이다. ‘거대한 정원’이라는 뜻의 투르크어 ‘카라바흐(Qaraba)’가 공식적인 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부터로 알려져 있다. ‘나고르노’라는 수식어는 산악 지역임을 뜻하는 러시아식 표기다.

아르메니아군 병사들이 카라바흐 지역의 전선에서 아제르바이잔군을 향해 야포를 쏘고 있다. 아르메니아 국방부가 10월4일(현지시간)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배포한 사진 ⓒAP연합

‘무슬림 기피’ 러시아, 기독교인 이주시켜

본격적으로 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다. 1805년 ‘퀴렉차이 조약’으로 카라바흐 왕조(Karabakh Khanate)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러시아제국은 1813년 이란과 ‘귈뤼스탄 조약’을 체결해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넘겨받는다. 곧이어 1828년 강화조약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한다. 러시아제국은 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 카라바흐를 포함한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이주할 수 있도록 법적·정치적 제도를 보장해 주었다. 이란과 오스만제국 등 무슬림 인구와 국경을 맞대는 것에 대한 불안감 해소가 목적이었다. 러시아제국은 기독교 인구를 정착시켜 보호막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인의 본격적인 정착이 이뤄진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불행한 학살과 포그롬(러시아의 소수민족 박해)에 대한 러시아의 역사는 ‘아르메니아-타타르 전쟁’(1905~06)이라 불리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시화된다. 이른바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 온 40만 아르메니아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카라바흐에 거주하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 역사를 뒤로하고 아제르바이잔은 1918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고, 카라바흐는 여기에 귀속된다. 1922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모두 소련연방국이 되는 시점까지도 폭동과 서로에 대한 학살은 이어진다.

소련 체제에서 카라바흐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공화국 자치구로 편입되지만 아르메니아는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카라바흐의 영토 분쟁이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카라바흐의 분리를 요구하는 아르메니아 이주민들의 지속적인 시위로 모스크바는 카라바흐 자치지역을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시키려고 했지만, 이는 곧바로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저지된다. 1989년 12월1일 아르메니아는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법률을 채택한다. 이를 모스크바가 눈감아주면서 상황은 악화된다.

설상가상으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끄는 소련 지도부가 1990년 1월 이른바 ‘검은 1월(Black January)’이라고 불리는 잔혹사의 주범이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적 책임을 무시하고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최신 기술과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무장군인을 풀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1월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날 밤이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57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부상당했다. ‘검은 1월’ 사건은 소련이 해체되는 데 결정적인 불씨가 됐을 정도로 소련연방 전역에 미친 부정적 영향이 대단했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무력충돌을 야기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무력충돌을 야기한 나고르노-카라바흐

‘불법 점령’ 아르메니아, 서구 지원 등에 업어

1991년 결국 소련은 해체됐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 독립국이 됐다. 아제르바이잔은 곧바로 본국에 자치지역으로 귀속됐던 카라바흐의 자치권을 폐지했다. 그러자 한 달 후 카라바흐는 국민투표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엔 회원국 그 어느 나라도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조차도 독립을 인정하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었다. 독립을 인정하는 순간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전쟁으로 대략 3만 명 정도의 사망자와 100만 명 정도의 실향민·난민이 발생했다. 1994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 7월에도 국경 지역(토부즈)에서 충돌했고, 지금 카라바흐 지역에서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카라바흐 충돌은 국제법상 모두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전’에 속한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에 군사기지를 두고 무기 공급을 해 왔던 러시아라 해도 아르메니아 군대를 지원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최근 아르메니아군은 카라바흐에서 멀리 떨어진 간자에 폭격을 가함으로써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집단안보조약기구(소련연방 내 국가들의 군사협력체)의 지원을 유도하기도 했다. 국제전으로 번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는 위험한 행동이다.

아르메니아 입장에서는 카라바흐가 자국과 공식적으로 통합되지 못할 바에야 현재와 같이 국제법상 ‘불법 점령’이라 하더라도 현 상태 유지가 최선인 셈이다. 아르메니아는 카라바흐가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의 역사적 고향이며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국제 여론을 형성하며 국제사회의 상당한 동조와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군사력이나 경제력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경우에는 전면전을 통해서라도 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 군대를 철수시키고 영토를 보장받겠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최근 벌어진 전면전을 통해 카라바흐 주변 아르메니아가 점령했던 지역을 상당 부분 탈환했다. 그러나 이미 200년 동안이나 얽히고설킨 포그놈과 전쟁의 역사 실타래를 풀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카라바흐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종교·민족·역사 전쟁은 비단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권과 패권싸움 또한 여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풀리지 않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렸던 알렉산드로스의 지혜는 무엇일지 국제사회가 다 함께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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