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를 만든 남자] 신동주50%, 신동빈37% 지분이 ‘형제의 난’ 씨앗
  • 천영준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2.01 14:00
  • 호수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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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 분석 ③]
쇼핑하려 강북 가던 시대 …15만명 집객 ‘잠실 롯데월드’로 뒤바꿔

한국에서 당한 두 번의 ‘배신’은 신격호에게 트라우마가 될 만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꿈은 1979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겨우 현실화됐다. 여수석유화학이 일본의 미쓰이석유화학과 합작투자로 만들어졌으나, 당시 오일쇼크를 비롯한 여러 환경의 악화 때문에 정부가 이를 민간에 매각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마저도 관료들은 “사실상 일본인인 신격호에게 국가사업을 매각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여수석유화학은  롯데와 대림 두 기업에 분할 매각됐다. 롯데로선 한국에서의 사업 다각화의 길이 여전히 험난했던 셈이다.

1979년 3월 롯데호텔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와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롯데 공식블로그

하지만 환경의 제약으로 위축될 때마다, 예기치 않은 또 다른 계기로 새로운 길이 열리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3년 반도호텔(8층, 111실 규모)을 인수한 일이었다. 반도호텔 인수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권유로 시작됐다. 외자 유치가 급했던 정부 입장에서는 신격호가 호텔 사업을 통해 한국에 계속 대규모 투자를 하길 바랐다. 물론 대통령의 제안에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았다. 뒤통수를 두 번이나 맞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동에 배석했던 이후락이 “이럴 때는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라고 재촉하는 통에 신격호는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식으로 호텔을 인수하기로 했다. 당시 반도호텔 인수 프로젝트는 삼성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격호는 ‘비원’이라는 TF를 구성해 전 세계 유력 호텔을 답사하고 설계·인테리어·서비스 등을 점검했다.

롯데호텔 설립을 위한 ‘비원’ TF 회의의 신격호(왼쪽)ⓒ동아일보
롯데호텔 설립을 위한 ‘비원’ TF 회의의 신격호(왼쪽)ⓒ동아일보

신격호 재산을 한국에 남기고 싶었던 박정희 정부

롯데는 여러 싱크탱크에 호텔 신축 관련 자문 용역을 맡겼다. 그중에서도 일부 보고서는 아주 현실적이고 제한된 규모의 사업 계획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 사정상 서울의 호텔에 체류할 만한 해외 관광객은 많지 않으며, 규모도 300실 정도가 적당하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롯데가 호텔을 직영으로 할 것이 아니라 힐튼이나 쉐라톤과 같은 세계적인 서비스 체인에 위탁 운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때 신격호에게는 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고(go)’ 사인이 났던 또 다른 호텔 프로젝트로는 남산 중턱에 위치한 1978년의 그랜드하얏트호텔, 1979년 개장한 신라호텔 등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갑자기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한 이유는 1970년 1월17일 새벽에 일어난 반도조선 아케이드 화재 탓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반도호텔과 조선호텔에 각각 머무르며 쇼핑을 하던 거리가 전소(全燒)되자, 박정희 정부는 관광정책을 대전환해 세계적인 여행 플랫폼을 서울 한복판에 내놓을 계획을 세운다. 신격호의 비원 TF는 하얏트나 신라호텔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기획을 원했다. “투자 규모 480만 달러(약 173억 엔), 부지 2만1460㎡(6503평), 지상 33층 및 지하 3층, 객실 수는 1205실 규모”로 계획을 내놨다. 당시 일본에서 최고층 빌딩이었던 가스미가세키 빌딩(1965년 준공)이 36층이었기에 매우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하지만 투자 형식이 문제였다. “외국인은 49% 이상의 지분을 보유할 수 없다”는 관련 법규가 관건이었다. 일본롯데가 100% 출자해 만든 한국롯데호텔이기에 있는 그대로 소유 구조를 적용할 경우 신격호는 경영권 행사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외자도입법이 큰 기회요소를 제공했다. “한국 국적을 보유한 자연인이 외국에 10년 이상 영주할 경우 ‘외국인에 대한 조항’을 적용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1966년에 만들어진 외자도입법 2조는 재일동포의 모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제도적 근거였다. 자본 부족 시대였기에 외국 자본은 부동산취득세와 재산세, 법인세 등을 5년간 면제받았고 그 후 3년간도 50%만 부과됐다. 신격호는 이 사실에 착안해 “재일한국인 시게미쓰 다케오가 대한민국 국민 신격호에게 경영권을 위임하는 형태로 100% 투자한다”는 계약을 만들었다. 이 내용이 정부 관료들에게 승인을 얻는 데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보증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당시 대장대신이었던 후쿠다 다케오(福田赴夫·후일 일본 총리)가 그 주체였다.

롯데가 이토록 제도적 장벽을 효율적으로 뚫은 데 대해 ‘특혜’가 아니냐는 시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 사정은 지금 같지 않았다. 정권 수뇌들 대부분은 ‘사실상 일본인’으로 분류되는 신격호가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에게 그대로 재산을 물려줄 경우를 염려했다. 외국에서 나고 자란 그들이 한국에 애정을 갖고 투자할 리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래서 신격호가 갖고 있는 막대한 재산 중 일부라도 부동산 형태로 한국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양한 조건을 지원해 가면서까지 롯데의 투자를 종용했던 것이다.

물론 호텔 프로젝트 과정에 꽃길만 있지는 않았다. 당장 화재 피해를 입었던 반도 아케이드 상인들이 집단시위를 하고, 여기에 반도호텔 직원들이 가세했다. 신격호는 기존 상인들에게는 이주비 명목으로 5000만원을 지급하고, 신설 호텔의 상점가를 분양하기로 했다(훗날 롯데 1번가). 당시 동작구의 92㎡ 규모 분양맨션 기준으로 6호(戶) 규모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반도호텔 종업원은 전원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신격호는 호텔에 인접한 아서원(雅敍園)이라는 중국요리점의 건물과 부지를 1969년 동생 신춘호 명의로 사들였다. 훗날 이 부지는 형제간 분쟁의 원인이 되지만, 대방동의 롯데라면 공장 부지와 맞교환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1974년 6월3일 반도호텔의 일반경쟁입찰은 호텔롯데의 단독입찰로 끝났고, 최종 불하가는 41억9800만원이었다.

1962년 사원 초청 수영대회. 신격호는 직원들의 복지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다이아몬드온라인
1962년 사원 초청 수영대회. 신격호는 직원들의 복지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다이아몬드온라인

김종필 “호텔 층수 높여라”, 차지철 “낮춰라” 개입도

신격호는 어떤 것이든 지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는 것은 더욱 혐오했다. 호텔롯데의 초기 설계에는 일본 굴지의 건설사 가시마건설이 참여했고, 당시 한국 최고의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공동으로 과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신격호가 여러 해외 사례를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생겨나자, 가시마와 김수근은 불만을 갖게 됐다. 결국 1975년 도다건설과 엄덕문건축사무소가 파트너로 기본설계를 하는 것으로 안(案)이 변경됐다. 최고의 건축가도 신격호의 소망을 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울 을지로 롯데서울호텔은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帝國)호텔을 모방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제 참고 사례는 게이오(京王)프라자호텔이었다. 요도바시 정수장 인근에 조성된 신도심 6호지에 지어진 이 호텔은 약 47층 규모로 세계에서 제일 층수가 높은 호텔이었다. 신격호는 게이오플라자 초기 설계에 개입한 일본설계사무소 소속 마쓰오 시게후미(松尾成文)의 안을 기본으로 해서 도다건설이 실시설계를 하도록 했다.

롯데호텔 건설이 시작되자 박정희 정부 상층부의 개입은 매우 구체화됐다. 우선 초대 호텔롯데 사장에 김동환이 취임했다. 그는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의 보좌관 출신이었다. 김종필은 지상 38층으로 돼 있던 기초 설계에 대해 ‘43층안’ ‘45층안’ ‘48층안’ 등을 내놓으며 사실상 증설을 요구했다. 층수가 늘어나는 만큼 공사 규모도 커지기에 요구사항의 속성이 어떤지는 뻔했다. 유신정권의 수뇌들은 챙겨야 하는 식솔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역으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청와대가 보이기 때문에 18층으로 낮춰라”고 통보했다. 롯데가 애초 설계한 내용보다 절반 이상 줄어드는 시공안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79년 롯데호텔 개관식의 신격호(오른쪽)와 신동빈ⓒ롯데공식블로그
1979년 롯데호텔 개관식의 신격호(오른쪽)와 신동빈ⓒ롯데공식블로그

롯데백화점 “한국 특유의 대충주의 문화 바꾼다” 선언

오일쇼크도 매우 큰 충격이었다. 중동발 오일 가격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건설사들의 시공비용이 급증했다. 당초 150억원의 공사비용은 1975년경 280억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국내 대형 건설사와 일괄 시공 계약을 맺기 힘들었기에 300여 개 중소 건설사와 부문별로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도 신격호의 의지를 꺾어놓지는 못했다. 동생 신춘호는 “역사에 남을 대형 건축물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호텔을 비롯해 아케이드, 백화점 등 복합쇼핑몰을 만들어 롯데를 관광유통 제국으로 만들기 위한 기획안이 만들어졌다. 호텔롯데에 쇼핑사업부가 만들어지고, 1976년 25층 규모의 백화점 설립안이 서울시를 통해 고시됐다. 고급 숙박시설에 유통업을 덧붙이는 과정은 국내 유통업계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판도를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 강북에 인구가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백화점이 을지로에 들어서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롯데는 “백화점이 아니라 쇼핑센터”라는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제도적 장벽을 돌파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3월10일 롯데호텔의 개관이 현실화됐다. 객실 규모는 1020실 규모였다. 애초 기획한 32개월의 공사 기간보다 17개월 늘어났고, 투자 규모도 4800만 달러 수준에서 1억4500만 달러 수준으로 3배나 증가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총공사비(1억9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항상 최고급 재료만 사용한 예술작품으로 롯데호텔을 전 세계에 선보인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979년 12월 롯데쇼핑센터 개장 행사에서 테이프를 커팅하는 신격호ⓒ시사저널 포토

‘롯데쇼핑센터’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26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혹자는 ‘신격호에게 준 유신정권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백화점 운영을 위해 롯데는 초콜릿 사업을 위해 브라크를 영입했던 것처럼 새 피를 수혈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미쓰코시, 다카시마야 등 일류 백화점 근무 경험이 있었던 아키야마 에이이치(秋山英一)였다. 그는 롯데쇼핑에 상무로 부임해 “백화점 운영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접객”이라는 대원칙을 세우고 “한국 특유의 대충주의, ‘괜찮아요’ 문화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식당가는 본격적으로 전문점 운영을 단행했다. 면세점은 호텔의 부속 사업으로 출발해 1984년에는 루이비통을, 1988년에는 에르메스를 직접 취급하게 됐다. 훗날 아키야마는 부사장까지 오르며 롯데를 종합유통 플랫폼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미 다양한 산업에 걸쳐 사업 다각화가 돼 있었던 롯데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 비즈니스 그룹화를 시작했다. 1980년 6월 한국후지사진파일판매를 설립하고, 같은 해 롯데냉장을, 1982년에는 대홍기획을 출범시켰다. 1983년에는 롯데중앙연구소와 유통사업본부가 만들어졌다. 일련의 과정은 경제 호황 덕분에 가능했다. 1979년 수준으로 1인당 GNP가 1600달러 수준이었던 것이 1987년에는 3200달러로 급증했다. 1981년 9월경 서독 바덴바덴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돼 경제 시스템에 큰 변화가 기대되던 시기가 1980년대였다. 산업화 이후 닥친 초(超)호황, 그리고 베이비부머들의 취업이 거의 완료되는 1990년대 초부터는 큰 규모의 관광·유통 소비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잠실롯데’ 프로젝트가 본격화된다. 1978년 83억원에 잠실 관광유통단지를 낙찰받았던 기업 율산이 1979년 거액의 부도를 냈다. 1982년에는 한국관광공사와 약 15만㎡를 매입했던 한양건설이 중동 건설 부진으로 다음 해 사업에서 철수했다. 신격호는 1984년 535억원을 치르고 잠실 유통사업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다음 해 안도 다다오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구로카와 노리아키(黑川紀章)에게 의뢰해 기본설계를 마쳤다.

당시 서울 강남 일대에는 제대로 된 소비 중심이 없었다. 쇼핑을 하려면 강북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 탓에 “대형 소매점, 레저문화시설, 오피스빌딩과 호텔까지 연결한 복합지구를 개발하더라도 1만㎡ 규모여야 한다”는 것이 아키야마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3만 평 이상이 아니면 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놨다. 그 정도 규모의 시설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15만 명 이상의 집객이 필요했다. 벤치마크 모델은 캐나다의 ‘웨스트 에드먼턴 몰’이었다. 에드먼턴은 40만 명 수준의 작은 도시지만 주말마다 테마파크에 10만 명가량의 소비자가 모여들었다. 신격호는 이 점에 착안해 잠실 유통 플랫폼을 종합 라이프스타일 센터로 도약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잠실 롯데월드’다. 테마파크 부문은 미국 디즈니랜드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를 담당했고, 실내는 롯데월드 어드벤처를, 석촌호수가 있는 실외에는 매직아일랜드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대형 오락시설을 완성했다. 지하철역과 유통점이 맞닿아 있고, 또 33층 규모의 대형 호텔이 들어서는 어마어마한 과제였다. 신격호는 빛을 활용한 공간 설계를 위해 강화유리를 사용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강재 기둥(1개당 70톤)을 세우기 위해 조선용 크레인을 동원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1984년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 경기를 관람하는 신격호(가운데). 오른쪽은 마쓰오 모리토 롯데 총무부장ⓒ스포니치
1984년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스 경기를 관람하는 신격호(가운데). 오른쪽은 마쓰오 모리토 롯데 총무부장ⓒ스포니치

롯데 융성기 이어가기 위해 꾀한 지배구조 변화

1970년대에 기획한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이 1980년대 경제 호황을 통과하며 엄청난 특수를 누리고, 올림픽을 위해 단행한 잠실 롯데월드 개발이 롯데를 일약 한국 5위 재벌의 자리에 올렸다. 하지만 이런 팽창 과정의 이면에는 신격호가 훗날 당하게 될 불행의 씨앗도 배태되고 있었다. 신격호가 환갑이 되던 1981년 무렵, 일본롯데는 큰 고민거리를 안게 됐다. 롯데 오리온스(이후 지바롯데 마린스)의 일본프로야구협회 회원 자격과 관련된 논쟁으로 인해 대주주 지분 조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협회 규정에 따르면, 회원사는 외국인 자본 총계가 49%를 넘어서는 안 됐다. 

1984년부터 일본프로야구협회 자격 유지를 명목으로 대주주 신격호의 지분 분할 작업이 시작됐다. 앞으로 다양한 산업에 걸쳐 생길 소유 규제도 고려한 대책이었다. 1985년에는 종업원지주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오늘날 일본 롯데홀딩스의 핵심 주주가 되는 모임(과장급 100여 명으로 구성)이다. 사원들의 소속감 고취 차원에서 만든 이 지주회는 관리직이 이사장으로서 결정 권한을 위임받아 주권(株權)을 행사하게 했고, 퇴사 시에는 주주 자격을 잃게 했다. 이 외에도 5~6% 지분율을 담당하는 임원 지주회, 그리고 일본롯데 전체 지배구조의 톱 역할을 하는 고준샤(光潤社)라는 포장재 회사가 설립됐다. 장남 동주에게 50%, 차남 동빈에게 37%의 지분이 각각 배정됐다. 훗날 일본 전국시대의 봉건 영주 가문에서 볼 법한 가독상속(家督相續) 분쟁은 롯데가 융성기를 이어가기 위해 신격호가 내렸던 지배구조의 변화로부터 그 씨앗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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