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천영우 “北 원전 문건, 청와대 지시 없이 작성 불가능”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2.08 14:00
  • 호수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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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정책과 충돌...삭제에 목숨 걸 수밖에”

‘본 보고서는 향후 북한 지역에 원전 건설을 추진할 경우 가능한 대안에 대한 내부 검토자료이며,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님.’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가 2월1일 공개한 ‘북한 지역 원전 건설 추진 방안’ 문건을 접하고 생경함을 느꼈다. 서두에 적힌 이른바 ‘면책 공고(Disclaimer)’ 때문이다.  

1977년 공직에 입문한 천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2차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다. 1999~2000년 신포 경수로 사업에 참여해 북한 원전 건설 이슈에 관한 식견도 어떤 외교안보 전문가보다 높다. 그는 “36년 공무원 생활을 되돌아봐도 첫머리에 그런 문구가 적힌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며 “일단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고 검토한 자료구나’ 싶었다”고 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이종현

문건을 작성한 산업부 공무원은 왜 ‘면책 공고’를 넣어놨을까. 

“면책 공고는 말 그대로 책임 회피를 위한 문구다. 정부가 작성한 문서에 그런 문구를 적은 건 평생 처음 본다. ‘문제가 있는 검토고, 언젠가 공개되면 내(작성자)가 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자발적으로 검토했다면 면책 공고를 넣을 필요가 없다. 위에서 시키니 마지못해 하는데, 미래에 문제가 불거질 상황에서 책임지지 않을 방법을 만들어 놓자는 차원으로 읽힌다.” 

‘위’라면 어디까지일 것으로 추정하나. 

“청와대의 지시가 떨어져야 정부 부처 공무원이 하기 싫은 일까지 억지로 할 수 있다. 다만 이번 사안에선 청와대에서 지시했다는 증거가 아직 드러난 게 아니니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추측의 영역이다. 검찰, 감사원 등에서 찾아내야 할 일이다.” 

‘윗선 지시 없이 실무자가 독단적으로 문건을 작성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혹 제기에 대해 최재성 청와대 정무수석은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를 통해 “내가 보기에 산업부 과장 입장에선 그 전 정부 때 더 구체적으로 이것(북한 원전 건설 논의)을 했었고, 또 2018년 4월 당시 보도를 봐라. 원전을 북한에 해야(지어야) 된다는 기사 수십 건이 났다 보니 아이디어 차원에서 했다”고 설명했다. 일선 공무원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자료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천 이사장 등 시사저널이 접촉한 전·현직 공무원 다수는 ‘공무원들은 청와대 지시 없이 그런 무거운 주제의 문건을 알아서 작성하는 부류가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신영대 대변인은 “북한 원전 건설 구상은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이 처음 언급했다”고도 말했다. 천 이사장은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대목에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전 정부를 걸고 넘어지는 걸 보니 이 정부 사람들이 굉장히 궁하고 당황하고 급한 상황인 듯하다”면서 “북한 원전 건설을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보면 곧바로 들통날 일을 왜 거짓말까지 하며 들먹이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봤다. 

외교통상부 2차관 시절 북한 원전 건설 문제를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2010년 10월5일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여해 ‘통일 이후 북한 지역에 여러 개의 원전 단지를 건설하면 에너지 안보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고 남는 전력은 중국 수출도 가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워딩에서도 드러나듯 이명박 정부 임기 안에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훗날 북한 비핵화와 남북 통일 이후 추진할 구상임을 분명히 했다. 반면 산업부 문건은 미·북 간 비핵화 협상 진전에 따라 대북 제재가 해제되고, 이후 남북 경협도 활성화되면 원전 건설도 가능하다는 판단을 토대로 작성된 것처럼 보인다. 내 발언의 맥락과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북한 원전 건설’이란 단어만 선택해 ‘이명박 정부도 같은 내용을 추진했다’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산업부는 왜 비핵화와 통일에 대한 언급 없이 북한 원전 건설을 구상했을까. 

“북한이 비핵화를 완료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복귀하기 전에는 법적·제도적으로 북한에 원전을 건설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으리라고 본다. 한마디로 잘못 알고 쓸데없는 검토를 한 것이다. 이적 행위를 할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론 이적 행위를 할 능력도, 방법도 없었던 셈이다. 야권이 처음부터 이를 이적 행위라고 단정했던 건 오버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북한은 2002년 제네바 합의 이행이 어려워지자 이에 반발해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한 뒤 이듬해인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2월3일 국회에서 열린 북한 원전 추진 의혹 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해 NPT 체제 밖에서 핵과 원전을 모두 가진 인도, 파키스탄을 예로 들며 “바로 북한이 노리는 방식이다. NPT에 들어가지 않으면 원전 제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게 오히려 비상식적”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산업부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북한 원전 관련 파일을 지웠던 것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천 이사장은 “북한 원전 건설을 추진한 비밀이 탄로 나는 것보다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탈원전 정책의 명분과 정당성을 부정하는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탈원전 정책과 북한 원전이 어떻게 상충하나. 

“북한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순간 그간 탈원전을 위해 내세워오던 모든 근거와 명분 자체를 완전히 파기하고 부정하는 것 아닌가. 원전이 그렇게 나쁜 거였으면 왜 북한에 지어주려 했느냐는 말이다. 결국 국내 원전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다. 북한에다 원전을 지어주려는 건 산업부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그게 탈원전 정책이 잘못됐다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돼 버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산업부 담당 공무원들이 직접 책임져야 할 수 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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