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 전쟁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떠오른 머스크
  •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9.24 08:0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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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회 “스타링크 꺼서 우크라이나전 개입” 의혹 조사 
국제 정세 움직이는 빅테크 CEO의 영향력 확인돼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최고경영인(CEO) 겸 수석엔지니어,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의 CEO 겸 제품 창안자인 ‘혁신 기업인’ 일론 머스크가 미국 연방상원의 규제에 직면했다. 미국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이 9월12일 출간한 《일론 머스크》의 일부 내용 때문이다.

9월7일 CNN방송은 《일론 머스크》의 발췌본을 인용해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에 있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잠수함을 드론으로 공격하려 하자 우크라이나가 공격할 수 없도록 머스크가 이 지역에서 스타링크 위성인터넷망을 끄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쟁 확대를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9월17일 머스크가 미국 뉴욕을 방문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
9월17일 머스크가 미국 뉴욕을 방문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AFP 연합

“크림반도에서 스타링크 끈 건 사실상 러시아군 보호한 것”

지난해 2월27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망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머스크는 스페이스X가 운영하는 스타링크의 위성인터넷과 모바일 통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로써 미 행정부와 서방,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칭송을 받았지만 이번 보도로 졸지에 ‘타락 천사’가 됐다.

만약 스타링크에 대한 보도가 사실이라면 민간인인 머스크가 민간 기업인 스페이스X의 위성통신 서비스의 가동을 임의로 조정해 우크라이나의 군사작전을 방해했다는 의미가 된다. 러시아의 침공에 대항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미국 행정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9월11일 AP통신은 프랭크 켄달 미 공군장관이 CNN의 스타링크 불능화 보도와 관련해 머스크에 불만을 토로했다고 보도했다. 12일엔 로이터통신 등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극동 지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머스크를 “훌륭한 경영인”이라고 칭찬했다고 보도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결국 9월15일 아이작슨은 《일론 머스크》의 해당 내용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스타링크를 끈 것이 아니라 원래 크림반도에선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머스크가 이 지역에서 이를 새로 켜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머스크도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당시 한밤중에 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며, 미 행정부가 크림반도 일대에 스타링크를 활성화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사태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일파만파 커졌다. 미 NBC방송 등은 잭 리드 미 연방상원 군사위원장이 이 내용을 조사할 것이라고 9월15일 보도했다. 리드 위원장은 이날 성명을 내고 “그 어떤 개인도 국가 안보 분야의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며 “군사위가 이를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이날 연방상원 군사위 소속 민주당 의원 3명은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머스크와 스타링크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 이들은 “크림반도에서 스타링크를 활성화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사실상 러시아군을 보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스타링크 사이트는 우크라이나에서 2014년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와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선 돈바스 지역 동부, 그리고 러시아 및 벨라루스 국경 지역에선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이나 친러 민병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거나 치를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번 사태는 두 가지 의미를 띠고 있다. 하나는 정보통신 분야가 최근 각광받고 있는 드론을 비롯한 무기 체계의 작동과 군사작전에서 얼마나 필수불가결한지를 재확인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보통신과 우주 관련 비즈니스를 장악한 머스크 같은 경제 거물에 대한 정치권의 통제가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9월12일 발매된 책 ≪일론 머스크≫의 표지 사진
9월12일 발매된 책 ≪일론 머스크≫의 표지 사진 ⓒAP 연합

첨단기술 통제권 둘러싼 정치권력과의 갈등

이는 스타링크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비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스타링크는 머스크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사업이다. 그가 소유한 민간 우주기업인 스페이스X가 600km(나중에 550km로 변경)의 지구 저궤도(LEO)에 무게 227~1250kg의 소형 위성을 다량으로 쏘아올려 브로드밴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2018년 5월 100억 달러를 투입해 사업을 시작했으며, 올해 8월말까지 5000개 이상의 위성이 발사됐다. 9월 현재 62개국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용자는 지난해 12월 150만 명을 넘어섰다.

눈여겨볼 점은 스타링크가 현지 당국의 허가와 무관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사실이다. 이란 당국이 지난해 9월 발생한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고 검열하자 스타링크는 이 지역에 인터넷 서비스를 가동했다.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이란 전역에선 억압적인 복장 규제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여기에 이어 스타링크가 지난해 2월27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긴급 대응으로 이 지역에 위성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 전기를 마련했다.

주목할 점은 스페이스X의 가공할 기술력이다. 스타링크 가동용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팔콘-9호 계열의 로켓 발사는 2010년 6월 첫 발사 이래 9월20일까지 무려 107회를 기록했다. 그동안 팔콘-9호는 부분 실패 1회, 전체 실패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발사에 성공했다.

1회 발사에 30~60개씩, 지금까지 모두 5135개의 인공위성을 궤도로 날랐다. 이 중 발사·궤도 안착에 실패한 것을 빼고 4764개가 궤도에 올랐으며, 이 가운데 4094개가 현재 가동 중이다. 스페이스X는 스타링크용 위성을 앞으로 무려 1만2000개까지 발사할 계획이다. 위성을 최대 4만2000개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구 궤도가 비좁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스타링크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구 궤도의 안전을 방해할 정도의 우주 쓰레기 증가와 우주 관측 방해를 염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렇게 위성을 엄청난 숫자로 쏘아올릴 수 있는 배경은 기술 혁신이다. 스페이스X는 팔콘-9호의 1단 로켓이 해상에 떨어지면 이를 회수해 재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해 발사 비용을 크게 줄였다. 2015년 12월에는 수직으로 발사돼 궤도에 올라갔다가 착륙장으로 되돌아와 수직 착륙하는 ‘수직 이착륙 방식’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켰다. 해상에서 1단 로켓을 회수하는 비용마저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이다.

머스크는 이렇게 절감한 로켓 발사 비용을 바탕으로 우주 사업을 확장하고 이 분야에서 장악력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혁신적인 첨단기술을 통해 활동 영역과 영향력을 확대한 민간 기업이 이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싸고 정치권력과 갈등을 일으킨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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