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약자들끼리 서로 손가락질을 하는 걸까 [배정원의 핫한 시대]
  •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25 11:00
  • 호수 179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 억울한 피해자와 약자 편에 서서 연대하며 공동체 만들어가야

지난주 《나의 올드 오크(My Old Oak)》란 영국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만든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해온 영국의 노장 감독이다.

《나의 올드 오크》는 영국의 한 퇴락한 폐광촌에서 중년 남자 TJ가 운영하는 오래된 펍(영국의 술집)을 중심으로 시리아 난민 공동체와 마을 원주민 공동체가 편견과 혐오를 겪어내고 화해와 연대로 가는 해피엔딩의 이야기다. 영화는 영국 정부가 주민들과는 상의도 없이 시리아 난민들을 가난한 이 동네에 정착시키면서 시작된다. 그들이 탄 버스가 도착하고 가뜩이나 자신들의 삶이 팍팍한데 시리아 난민들까지 이사 오는 게 못마땅한 주민들과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한 시리아 젊은 여성의 도움 요청으로 우정이 싹튼 펍 ‘올드 오크(Old Oak)’의 주인 TJ는 두 공동체 사이의 가교 역할을 위해 애쓰지만 동네 주민들은 오히려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TJ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며 예전의 마을 공동체를 회복해 시리아 난민들을 내쫓고 싶어 한다. 이에 실망한 TJ는 친구들을 찾아가 말한다. “삶이 힘들 때 우리는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더한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것이 더 쉬우니까.”

ⓒ 일러스트 배중열
ⓒ 일러스트 배중열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 위한 예산 줄여

영화는 시리아의 난민 공동체와 원주민 공동체의 연대와 서로에 대한 따뜻한 지지로 끝난다. 그리고 시종 영화 안에는 옛날 탄광 사고로 80여 명이 죽고 폐광이 되었던 때, 모두 극심한 슬픔과 가난 속에서도 함께 밥을 나누며 서로를 돌보고 끌어안았던 연대의 이야기,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욱 강해진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나지만 보는 내내 마음은 영 편하지 않다. 공감은 가지만 영화 속 메시지가 현실 속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난민과 원주민들의 갈등이었지만, 사실 속내는 살기 위해 더 힘든 이들끼리 다투도록 하는 부와 사회적 신분, 권력을 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있어야 함을, 그리고 그에 대한 또 다른 대응으로서 약자들의 연대를 켄 로치 감독은 말하려 한 것 같다. ‘왜 우리는 우리를 못 살게 구는 정치가나 권력을 향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우리보다 못한 이들을 희생양 삼아 공격과 불만을 쏟아내느냐’고 그는 TJ의 입을 통해 외친다. 약자들의 연대만으로는 조속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지만 최소한 그렇게라도 뭉치고, 문제 제기를 하고, 소리라도 쳐야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쉽게 읽힌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성폭력 피해자들, 여성과 청소년, 노인, 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를 위한 예산을 줄이는 긴축 기조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로 인해 초·중·고 학생의 성인권 교육예산 5억5600만원이 전액 삭감되었으며, 24년간 직장 내 성차별·성희롱 사건을 상담으로 지원해온 고용평등 상담실 운영예산이 절반 삭감되었고, 이주 여성노동자의 주거와 안전을 상담 지원하는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여성·시민단체들은 ‘피해자와 약자를 잘 지원하는 방안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과 연구 없이 정부가 손대기 좋은 형태로 지원체계를 전환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젠더 폭력은 정부의 관련 예산 삭감이 분명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남편·애인의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여성 살해·폭력 사건은 개인 간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시스템의 문제다.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는 말은 정부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폭력·혐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사회의 고질적인 성차별로 인한 젠더 갈등이 20대 남녀의 갈등으로 치부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비교할 수 없는 공적 영역의 군대와 사적 영역의 돌봄과 보호 활동의 경중으로 다툰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과 기관보다 피해 당사자들끼리 다투게 하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 예의도 염치도 없어지고 댓글 등을 포함해 더 약한 이를 향한 혐오는 더 거세지기만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생 국가로 손꼽히지만, 사회와 기업은 아이의 출생을 반기지 않으며, 오히려 불편해하고 불이익을 준다.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정부가 손 놓고 금전 보상을 이야기할 때 노키즈 존을 만들어 아이들과 부모의 출입을 제한하는 사회, 유아차에 아이보다는 반려견이 더 많이 앉아있는 사회로 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로 보인다.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심리적 자율과 독립을 위해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20년간 싸워온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분투의 가장 힘든 대상은 그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시민들이다. ‘왜 하필 출근시간이냐?’ ‘장애가 훈장이냐?’ 등 적지 않은 시민과의 다툼 속에 전장연이 이동권을 요구하며 버스 밑에 기어 들어가고, 출퇴근 시 끌어내려지고 내팽개쳐지는 투쟁을 통해 지하철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다. 그 시설들은 장애인뿐 아니라 이제 임산부·어린이·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함으로써 이동권을 제한해 왔던 정부의 방침은 장애인 복지시설이나 학교, 보호시설을 지을 때마다 지역주민들의 항의와 데모에 의해 번번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나라 산업의 기반이 돼버린 제3국 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복지, 보호 역시 정부의 합리적인 정책보다는 경영자와 고용주의 관계 속에서 위태롭다. 

 

댓글로 물어뜯는 익명 뒤에 숨은 약자들

한국 사회는 왜 매번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약자끼리 싸우게 하는가? 20대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시민, 이민자와 고용주, 양육자와 카페 주인들, 언론이 떠올려주면 하이에나처럼 몰려 댓글로 물어뜯는 익명 뒤에 숨은 약자들.

책임져야 할 사람들과 기관보다 피해 당사자들끼리 다투게 하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 예의도 염치도 없어지고 댓글 등을 포함해 더 약한 이를 향한 혐오는 더 거세지기만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광복 후 6·25, 4·19, 5·16 등등. 그리고 최근 불과 몇 년 전의 촛불집회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고비마다 잘 넘겨왔으며 그 역사 안에 해결법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들에게 민주주의란 부정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 억울하게 고통받는 피해자와 약자 편에 서서 연대하며 만들어온 사회체제라 할 것이다. 

숨을 고르고 2024년,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책임 있는 곳에 책임을 확실히 묻고, 우리는 새 시대를 단단하고 다정한 공동체로 연대하며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