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캉 사건’ 피해자는 못 보는 가해자의 반성문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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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측 “피고인, 하루에 한 번꼴로 반성문 제출…보복범죄 두려워”
반성문 열람, 판사 재량…민사소송 통해 가능하지만 신상정보 노출 우려

 

'바리캉 사건'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 초반)씨가 피고인 김아무개(26·구속 기소)씨로부터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잘린 모습 ⓒ피해자 가족 제공
'바리캉 사건'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씨가 피고인 김아무개(26·구속 기소)씨로부터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잘린 모습 ⓒ피해자 가족 제공

“도대체 반성문은 누가 쓰고 있고 누구를 향해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친)

교제하던 여성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고 강간한 ‘바리캉 사건’의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씨가 지난 19일 피고인이 쓴 반성문을 열람하게 해달라는 신청서를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앞서 1심 재판부인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은 해당 신청서를 거절한 바 있다.

박씨 측이 반성문을 열람하려는 이유는 피고인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 보복범죄에 대비하려는 차원이다. 하지만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의 반성문 열람 여부는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 측은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재판부가 불허할 경우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 과정에서 신상정보가 노출되는 문제점도 있다. 이에 범죄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일 ‘바리캉 사건’의 피해자 부친 박승욱(가명·50대)씨는 시사저널과 통화에서 “최근 피고인이 하루에 한 번꼴로 법원에 반성문을 쓰고 있는데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가 아니라 감형을 노린 것이 아닌가”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박씨는 “피고인은 사건 발생 당일인 지난해 7월11일부터 8개월 동안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고 법정에서 피해자 측을 향해 고개 숙인 적도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법원에 제출하는 반성문은 도대체 누가 쓰고 있고 누구를 향해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박씨는 피고인이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을 직접 봐야한다는 입장이다. 혹시 모를 보복범죄를 대비하는 차원이다. 그는 “대체 피고인이 어떤 생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오죽하면 접견을 가려고 했다”며 “만약 복수의 칼날이라도 갈고 있다면 딸아이와 아내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털어놨다.

현행법상 피해자가 반성문을 열람하려면 법원에 직접 열람·등사 신청을 해야 한다. 이후 담당 판사의 재량에 따라 열람 여부가 결정된다. 비공개 결정이 나도 사유는 공개되지 않는다.

'바리캉 사건'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 초반)씨가 어머니(왼쪽)와 아버지(오른쪽)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피해자 가족 제공
'바리캉 사건'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씨가 어머니(왼쪽)와 아버지(오른쪽)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피해자 가족 제공

열람 허가 가능성은 희박“재판부의 피고인 방어권 보장 차원”

피해자가 재판부로부터 열람을 허가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 마태영 변호사는 “지금까지 소송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피고인의 반성문에 대한 피해자의 열람·등사가 허용된 적 없다”면서 “공판이 시작되면 피해자가 열람할 수 있는 문서는 공소장과 본인의 진술서밖에 없다. 피고인이 제출한 증거 서류나 피고인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 대해선 허가가 잘 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법무법인 시우의 이용민 변호사는 “형사 재판에 있어서는 검사가 재판을 담당하기 때문에 피해자일지라도 반성문 열람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며 “아직 종결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해 재판부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우려에도 박씨 측은 19일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에 피고인의 반성문 열람·등기 신청을 했다. 피고인이 1심 과정에서 제출한 반성문은 가해자에게 민사소송을 걸어 문서정보 촉탁을 통해 받아낼 계획이다.

그는 “하다못해 1심 재판부에 제출한 반성문이라도 봐야 하는데 문서를 전부 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피해자 가족이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다. 대한민국의 제도가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바리캉 사건' 피고인 김아무개(26·구속 기소)씨가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 초반)씨에게 작성을 지시한 메모 내용 ⓒ피해자 가족 제공
'바리캉 사건' 피고인 김아무개(26·구속 기소)씨가 피해자 박수정(가명·20대)씨에게 작성을 지시한 메모 내용 ⓒ피해자 가족 제공

범죄 피해자의 재판기록 열람권 강화 요구는 꾸준히 있어왔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필명)씨는 자신의 1심 재판 기록을 보고자 열람을 신청했지만 법원의 거부로 별도의 민사 소송을 제기해 사건 관련 정보를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 개인 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돼 보복 협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무턱대고 민사소송을 제기하기 부담스러운 이유다.

한편 여자친구를 감금해 엽기적인 방식으로 학대하고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른바 ‘바리캉 폭행남’ 김모씨는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양형 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한 상태다. 검찰 역시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 재판은 내달 16일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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