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절박한 김정은 “식량 대책, 4월까지 마련하라”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8 08:00
  • 호수 15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남아 A국 대사에게 보낸 北 외무성 훈령 단독 입수
“다른 나라로부터 당장 조달해 와라”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보다 더 절박한 혁명 임무는 없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나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공개 메시지다. 3월6일, 7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조선노동당 초급선전일꾼대회를 기념해 보낸 서한에서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첫 메시지로 ‘경제발전’을 언급했다. 서한에서 김 위원장은 “전체 인민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게 하려는 것은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위대한 장군님(김정일)의 평생염원”이라고 강조했다. 

일단 김 위원장의 메시지만 놓고 본다면, 이는 하노이 회담 결렬에 따른 ‘새로운 길’, 다시 말해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일반의 예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동창리에서 미사일 발사대 건설이 재개됐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지만, 김 위원장 등 지도급 인사들은 경제건설 현장을 찾아 주민들을 달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를 ‘핵’과 ‘미사일’을 숨기기 위한 위장 행보로 의심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김정은 정권은 확실히 경제건설에 ‘올인’하는 모습이다. 선대 유훈까지 내세우며 주민들에게 “배부르게 먹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건 지금까지의 북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반대로 현재 북한 경제가 그만큼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북한 경제가 어떤 상황이기에 이런 발언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혹시 일각의 의심처럼 위장 전술은 아닐까. 시사저널 취재진은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결정적인 북한 공문서를 입수했다.   

2011년 10월8일 한 북한 주민이 원산 외곽지역을 걷고 있다. ⓒ AP 연합
2011년 10월8일 한 북한 주민이 원산 외곽지역을 걷고 있다. ⓒ AP 연합

“알곡(쌀) 수확고, 지난해 50만 톤 줄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공문서는 3월초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대북 소식통을 통해 받은 북한 당국의 외교 훈령이다. 이 문서는 올 2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외무성이 수교 중인 동남아 A국가 대사에게 보낸 이 문서에는 「2018년 알곡(쌀) 수확고 495만1000여t(톤). 이것은 지난해 알곡 생산량보다 50만3000t 감소된 것」이라고 써 있다. 훈령이 전달된 A국가는 북한에 있어 동남아 지역의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쌀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9% 이상 감소했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내용이다.  

북한의 식량난은 유엔(국제연합) 등 여러 국제기구를 통해 꽤 오래전부터 알려졌다. 주요 외신들은 3월7일(현지 시각) 유엔개발계획(UNDP) 보고서를 인용해 지난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10년래 가장 적은 수준이었다고 보도했다. 2015년부터 평양에서 활동해 온 유엔 상주조정관 겸 UNDP 북한사무소장 타판 마쉬라가 쓴 보고서에는 인구 1100만 명이 먹을 식량분이 부족한 것으로 나와 있다. 전체 인구의 43% 이상이 영양부족, 어린아이 5명 중 1명이 만성영양실조 상태다. UNDP는 이러한 북한 식량난의 원인을 경작지, 비료, 현대 농업기구의 부족 등으로 설명했다.   

식량난의 원인이 기후변화와 대북제재라는 UNDP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북한 외무성 역시 공식 문서에서 「지난해 알곡 생산량이 감소된 원인은 고온과 가물(가뭄), 큰물(홍수) 등 자연피해」라고 밝혔다. 또 「영농물자납일까지 제한하고 있는 ‘제재’」도 식량난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주목했다. 외무성은 「△영농기재 △화학비료 △살충제 △살초제 △정제원유수집제한」을 구체적인 제재 항목으로 꼽았다. 

이러한 분석은 2월말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이 끈질기게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을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정상 간 회담이 결렬된 직후 2월28일 밤 가진 기자회견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구체적으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5건을 얘기했고, 그중에서도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3월6일 CNN은 인터넷판 뉴스 ‘모욕과 마지막 시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하노이 회담의 비화를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 대미 외교의 핵심인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며 미국 측 협상팀이 회담장을 떠나려고 하자 부랴부랴 김 위원장에게 가서 이를 물었고, “핵시설 모두를 포함한다”는 답변을 받아왔다고 밝혔다. CNN은 최선희가 관련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매우 서둘렀다고 설명했다. 내용이 사실이라면, 북한으로선 당면한 경제제재, 더 정확히 말하면 심각한 식량난을 이번 하노이 회담을 통해 해결해야 했다. 

자료: UNDP

“다른 나라서 20만 톤 식량 수입해도 절대 부족”

경제제재로 경제 사정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북한 스스로가 인정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식량난이 제재 때문이라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사실은 내부 고위급 간 소통수단인 외교문서를 통해서나 확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의 경제 상황은 어느 수준일까. 공식적으로 북한은 대외적으로 경제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국내에서 이를 꾸준하게 분석하는 곳은 한국은행 정도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7년 북한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3.5%를 기록했다. 대북제재가 현실화된 2018년은 이보다 사정이 심하면 심했지 결코 좋지 못하다. 한은은 지난해 북한의 GDP 성장률을 -5%로 봤다.  

식량난에 대한 북한 정부의 대책은 뭘까. 외무성 문서에는 「정부(북한 정부)는 대책으로 시급히 다른 나라들로부터 식량수입 조치를 취하는 한편, 농사에 힘 집중하면서 당면하여 올 곡식생산량 늘리고 기본작물 생산을 높여 식량안전 보장 위해 노력」이라고 명시돼 있다. 수확량을 대대적으로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해외로부터 식량을 대량 들여오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대북제재망이 촘촘한 상황에서 쉽지만은 않다. 북한 외교문서 역시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로부터 20만t의 식량 수입하고, 올곡식 40만t 생산한다고 해도 올해 부족량은 148만6000t으로서 절대적으로 부족」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의 식량난을 우려하는 보도가 2월부터 쏟아지고 있는 것도 예사롭게 볼 대목이 아니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통해 관련 소식을 알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만큼 사정이 나쁘다는 뜻이기도 하다. 2월22일 로이터통신은 북한에서 활동하는 관계자의 말을 빌려 “2019년 북한의 식량 부족분이 140만 톤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유엔식량계획(WFP)이 지난해 11월26일부터 12월12일까지 조사를 통해 관련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북한 정부는 WFP 등 국제기구에 북한 식량 문제 해결에 신속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대북제재가 심각해지면서 체제 존립이 위험 수준에 이르자, 북한이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동원 가능한 국제기구 모두를 통해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 소식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이러한 행보가 대북제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의도적 포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발효된 유엔 제재안에서 ‘인도적 지원’은 제재 품목에서 빠진다. 비료 등 화학제품도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만 있다면 충분히 들여올 수 있다. 김영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비축분이 없는 상황에서 2년 연속 생산량이 줄어들어 식량 수급에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쌀 가격이 폭등하는 등 이상 징후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난에 대한 북한 지도층의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대북 소식통들은 한목소리로 지난해 말부터 김정은 위원장이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선 것은 북한의 자금난이 윗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한다. 말라가는 돈줄에 대한 걱정 차원에서 중간중간 새는 돈을 막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10일 노동신문은 ‘우리 당은 세도와 부패가 일심단결을 파괴하고 좀먹는 위험한 독소로 보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보도했다. 또 올해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당과 대중의 혼연일체를, 사회주의제도를 침식하는 제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의 크고 작은 행위들을 짓부숴버리기 위한 투쟁의 열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 UNDP
자료: UNDP

北, 인도적 지원으로 대북제재 틈새 찾았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지난해 12월30일 자신의 블로그에 “북한이 지난 7년간 김정은의 군 영도업적 중 하나를 ‘군부의 특수화와 세도, 관료주의, 부정부패의 사소한 요소도 짓뭉개버린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군부 내 부정부패 심각성을 공개적으로 내비쳤다”고 주장했다. 태 전 공사는 “지금까지 북한에서 군대는 북한 사회를 앞장서 이끌어 나가는 혁명군대였으며 도덕기풍 면에서 온 사회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였다”며 북한 매체들의 이러한 분석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이번 외교문서에서 북한 외무성은 A국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현 식량상황의 위험성 정확히 리해(이해)하고, 시기성 보장위해 최선 다해줄 것, 4월 중에 실현해야 함.」 

식량난 문제가 체제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으며 원조든 수입이든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4월 중에 해당 국가에서 대규모 식량을 북한으로 들여올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 문서를 전달받은 A국 북한 대사의 다음 행보가 사뭇 궁금해진다. 

“강력한 대북제재 속에서 경제 성장할 수도”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

1974년 북한 자강도 희천시 태생인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199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9월 남한으로 왔다. 늦깎이로 대학(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가 2001년 졸업했다. 졸업 후 탈북민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김성호 새천년민주당 의원) 비서관도 지냈다. 민간기업(대성그룹)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며 2000년부터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김 소장은 김정은 시대에 가장 달라진 점으로 ‘장마당경제’를 꼽았다. 김 소장은 “대북제재로 정부 차원의 경제가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마당까지 규제한다면 북한 경제는 극단적으로 아사경제시대(1996~2000년)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럴 경우 정권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100%”라고 전망했다. 

김 소장이 말하는 1980년대까지 북한은 ‘살 만한 나라’였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치르고 난 후부터 삐걱거렸다. 여기에 1990년대 초·중반 자연재해가 일어났으며, 동구권의 체제 변동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경제난이 심화됐다. 김 소장은 “대북제재로 당장 더는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을 수도 있으나, 그 속에서 나름대로 경제가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