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가 이희호 선생’ 하늘의 별이 되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4 15:44
  • 호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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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동지...민주주의와 여성, 평화 운동에 큰 족적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악수해 본 사람은 안다. 이 여사 손에서 젊은이 못지않은 ‘강한 힘’이 느껴짐을. 이 여사가 상대방 손을 꽉 잡으며 악수하는 건 ‘당신과 나는 동지’라는 강한 유대감을 전하는 의식이다. 그런 이희호 여사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지난 6월10일 밤 11시37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18일 서거한 지 10년 만이다.

지난 6월11일 오후 3시경, 분향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조문객 발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취재진 200여 명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록하고 있었다. 빈소에 놓인 영정은 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 시절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이 여사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사진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은 지난 4월20일 별세했다. 이에 2남 김홍업 전 의원과 3남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분주히 맞았다.

ⓒ 시사저널 최준필
이희호 여사가 돌아가신 이틀 뒤인 6월1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의 서울 동교동 자택 대문 앞에 꽃이 놓여 있다. ‘김대중’ ‘이희호’ 문패는 여전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문희상 “DJ 부부, 음식 문제로만 티격태격”

빈소에는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이훈평 전 의원 등 과거 동교동계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빈소에서 만난 김옥두 전 의원은 “여사님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하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셨다. 하나님을 믿고 국민을 믿으면서 그 고통을 견뎌내셨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여권(女權) 신장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님과 똑같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투쟁하셨다. 대통령님의 수호자이시고 동반자로 민주주의의 든든한 동지셨다”고 평가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6월11일 오전 10시40분쯤 유가족을 제외하곤 가장 먼저 영정 앞에 헌화했다. 오후 2시쯤 다시 빈소를 찾아 밤 11시까지 조문객을 맞았다. 다음 날인 12일 오전 문희상 의장은 전화통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서로 굉장히 존경하는 사이였다. 서로 경어를 썼다. 문패도 이름을 나란히 걸었다. 보통 부부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면서도 “다만 대식가(大食家)이셨던 대통령님께서 대구포나 홍삼 등 질겅질겅 씹는 음식을 좋아하셨다. 그런데 여사님께서 ‘건강에 안 좋으시다’며 만류하는 모습을 봤다. 그 외 정치적인 견해나 종교적인 차이(김 전 대통령은 천주교, 이 여사는 개신교 신자) 등으로 토론하거나 갈등을 겪은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이 여사와 문 의장 부인 김양수 여사의 인연도 소개했다. 이 여사가 1960년대 초 YWCA(대한여자청년단) 총무 시절 김 여사는 후배 간사였다. 문 의장은 “여사님께서 내 처를 만나실 때마다 YWCA 얘기를 하셨다”고 말했다. 문 의장은 영결식 조사(弔辭) 낭독에 앞서 본지에 조사 일부를 전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 이 여사께서 하신 말씀”이라며 “참 쓰리고 아픈 세월을, 그 고난의 세월을 잘도 참고 견디셨던 당신을 저는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라고 헌사했다.

이 여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인권 신장 등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여권신장에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22년 9월21일 서울 수송동 외가에서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고녀(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이화여대)을 졸업했다. 아버지 이용기씨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의사였다. 이 여사는 충남 예산 삽교보통학교 부설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활동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영문과 재학 중 교육학과로 전과해 졸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기 이전에 ‘대성(大成)’할 여성운동가였다. 이 여사가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한 시점은 YWCA 외교국장을 맡고 있던 한국전쟁 즈음이다. “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하면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라간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가 있을 뿐이었다. 몽골군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는 화냥년으로, 일제강점기에 끌려간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양공주’로 낙인찍히고 멸시당했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2008년 출간된 이희호 자서전 《동행》 중에서)

실제로 평생 여성 인권신장에 크게 힘썼다.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박사, 첫 여성 당 대표 박순천 여사 등 당대 엘리트들과 ‘여성운동 1세대’로 꼽힌다. 여성문제연구원 간사를 맡으며 여성노동자 노동환경과 여성의 정치의식을 조사했다. 남성 정치인들의 ‘요정 정치’ 반대운동을 펼쳐 주목받았다. 미국 스카릿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에도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로 동분서주했다. 당시 가족법 개정, 축첩(蓄妾) 정치인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 여성 인권 찾기에 발 벗고 나섰다.

1987년 7월25일 당시 김대중 민주당 상임고문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서울 동교동 자택 정원에서 정원수를 손질하는 모습 ⓒ 연합뉴스
2011년 12월 이희호 여사가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에 조문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위로하는 모습 ⓒ 연합뉴스
6월12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낸 조화와 함께 들어서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DJ 여성정책 뒤에 이희호 여사 있다”

1962년 5월10일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후에도 여성운동은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에서 이 여사를 “영원한 동지 ‘5월 신부’”라 칭했다. 이후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를 하면서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범태평양 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 등으로 우리나라 여성운동이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오늘날 ‘과학적 페미니즘’ 운동의 주춧돌을 다졌던 셈이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인 2000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여성재단 명예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6년 출간된 《이희호 평전》에서 이 여사는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술회했다.

김 전 대통령도 ‘페미니스트’ 퍼스트레이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의 정부의 각종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여성부가 처음 신설됐다. 김 전 대통령 이전에 청와대 여성 비서관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에선 10명으로 늘었다. 내각에도 여성이 진출했다. 초대 여성부 장관 한명숙 전 총리를 비롯해 총리 후보였던 장상 전 총리서리 등이 대표적이다. “DJ의 여성정책 뒤에 이희호 여사가 있다”고 회자될 만도 했다. 

이 여사는 DJ 서거 후 몇 년 동안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지 않았다.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는 게 이 여사 비서의 전언이었다. 이 여사는 2011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이 많이 생각날 때’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일과 (2009년 8월18일) 돌아가신 날, (2000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 수상일이 되면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이제 그리움은 끝났다. 남편과 10년 만의 해후다. 서울 동교동 사저 대문 옆엔 6월12일 현재도 ‘김대중(金大中)’ ‘이희호(李姬鎬)’ 한자 문패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란히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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