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위기는 ‘자해정치’의 결과물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27 14:05
  • 호수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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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집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 능력, 심각한 수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상식적인 사고와 판단 해야

#1. 육군은 10월16일부터 홍범도·김좌진 장군 등을 기리는 육군사관학교의 ‘독립전쟁 영웅실’ 철거에 들어갔다.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은 “육사 설립 취지나 생도들의 대적관 확립을 위해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민의힘 소속 한기호 국방위원장은 “이념이 분명하지 않다면 육사를 설치할 필요가 없다”며 “혼란스럽더라도 소신을 가지고 하라”고 홍범도 흉상 이전을 적극 엄호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의 참패를 낳은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 가운데는 윤석열 대통령이 선도했던 이념전쟁이 앞 순위에 꼽히고 있다. 정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 대다수는 그 결과를 예견했지만, 뒤늦게야 이를 깨달은 용산 대통령실은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던 윤 대통령의 말을 “민생이 제일 중요하다”로 바꿨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흉상이 중대한 국정과제라도 되는 듯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광경은 보궐선거 이후에도 그대로다.

#2.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에 앞장섰던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그 사이에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신 장관은 취임 이후 9·19 남북군사합의를 최대한 신속하게 효력 정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10월23일에도 해병대 연평부대를 방문해 “9·19 군사합의는 잘못된 합의”라면서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9·19 군사합의는 장병들의 안전뿐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할 수 없는 잘못된 합의”라는 것이 신 장관의 주장이다. 물론 북한이 핵무장을 가속화하는 마당에 9·19 합의 때문에 대북 감시·정찰 활동 등에 제약이 따른다는 군의 입장은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효력 정지 조치에 필연적으로 이어질 남북 간 군사적 충돌 리스크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를 정부와 여당은 국민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지금과 같이 남북 간에 핫라인조차 끊긴 상황에서는 우발적인 소규모 충돌도 언제든 국지전 혹은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엄정한 대응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상황 관리에 대한 균형 있는 판단 없이 강경으로만 치닫는 국방정책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브레이크 없이 터져 나오는 9·19 합의에 대한 효력 정지 추진은 소통 없는 일방적 국정 운영의 대표적 사례다.

ⓒ시사저널 박은숙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가 10월12일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김기현 대표와 윤재옥 원내대표 등이 자리해 비공개 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구체적인 성찰 없이 추상적인 구호들만 이어져

윤 대통령은 10·11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국민의힘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선거 전까지 보였던 윤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통치 모습을 떠올리면 만시지탄이지만 쌍수를 들어 환영할 발언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국민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보선 패배 이후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가를 국민 앞에서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참모들을 향해 “소통을 더 강화하라”고 지시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참모도 책상에만 앉아있지 말고 국민들의 민생 현장에 파고들어 살아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으라”고 지시했다. 

민심은 대통령이 느닷없는 이념전쟁의 전사로 나서도, 지금이 윤석열 정부인지 이명박 정부인지 분간 안 될 정도의 인사를 반복해도 찍소리 한마디 하지 못해 왔던 참모들과 여당의 무능을 질타해 왔다.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바뀌어야 할 장본인은 윤 대통령 자신이다. 대통령실 참모들도 여당 지도부도 대통령의 기에 눌려 눈치만 살피는 환경에서 대통령이 달라지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그러니 마치 참모들에게 민심이반의 모든 책임이 있는 양 유체이탈식 지시를 날리기 이전에 윤 대통령 자신이 달라지겠다는 말을 국민에게 직접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성찰이 막연하니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대통령은 “민생이 제일”이라고 말을 바꾸었는데, 정작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같은 이념적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소모적인 이념 논쟁 촉발하는 행위들 여전히 계속

보궐선거 이후 ‘용산’에서도 국민의힘에서도 변하겠다는 말의 성찬이 요란하다. 하지만 민심을 가장 자극해온 핵심 포인트들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 없이, 추상적인 구호들만 이어진다는 느낌이다. 당정이 정책 소통을 하고 여당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물론 필요하지만 집권 세력 내부 자신들끼리의 얘기일 뿐이다. 민심이 이 정도로 악화된 핵심적 사안들은 따로 있는데 곁가지의 주변적 사안들만 갖고 쇄신을 얘기한다. 민심을 성나게 만든 핵심 사안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주변적인 문제들만 갖고 떠든다고 해서 내년 총선에서 달라질 것은 없다. 

윤석열 정부가 달라져야 할 지점들을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우리가 대신 말하는 수밖에 없다.

첫째, 이념 우선에서 민생 우선으로의 국정 노선 전환은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대통령실은 연일 민생을 강조하고 있는데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촉발하는 행위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실의 변화 의지가 구호에 불과하다는 불신을 받게 된다. 

둘째, 인사 쇄신은 국민의 피부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와닿는 사안이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결단하지 못한 일도 보선에서 민심을 악화시킨 큰 요인이었다. 선거가 참패로 끝나고 나서야 사후약방문 식으로 사퇴한 광경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안이함 자체였다. 윤 대통령은 주변에 포진한 극우 이념에 갇힌 인물들을 새로운 인재들로 교체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민심은 대체 대통령 주변의 누구들이 때아닌 이념 전쟁의 길로 대통령을 인도했는가를 묻고 있다. 낡은 이념에 갇힌 인물들을 교체하고 미래형 사고를 가진 새 인재들을 기용하는 인사 쇄신은 미룰 일이 아니다.

셋째,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사퇴하는 것이 옳다. 윤 대통령은 선거 패배 직후 참모들 앞에서 ‘차분한 변화’를 주문했다. 이는 사실상 국민의힘 지도부 사퇴에 선을 긋는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김태우 공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간에 선거의 총책임자는 김 대표였다. 그런 그가 당내 일각의 사퇴론을 일축하고 대신 혁신위원회를 만들었다. 자신의 얼굴로 총선을 치르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 초반까지 하락한 환경에서 대통령의 뜻만 따르는 여당 대표가 인기 있을 리 만무하다. 김 대표가 생각하는 혁신은 불편하지 않고 원만하고 무리 없는 혁신인 것으로 보인다. 새로 만들어진 인요한 혁신위도 사실상 김 대표 직속 기구처럼 인식된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예상된다. 과연 김 대표의 얼굴로 총선에서 반전을 이룰 수 있을지 국민의힘은 자문해야 할 상황이다.

보궐선거 이후의 상황을 보면서 새삼 놀랐던 것은 현 집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 능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이었다. 보궐선거 원인 제공자를 사면복권시켜 공천하고도 이길 것으로 믿은 비상식적 판단, 선거를 눈앞에 두고 이념 전쟁과 홍범도 논쟁을 촉발한 무모함을 보면 보선 패배는 ‘자해정치’의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용산’과 국민의힘 모두 국민 눈높이에 맞는 상식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는 상태로 돌아오는 일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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