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재 육성 경쟁’ 돌입한 재계 “위기 돌파구는 결국 사람”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4.01.22 07:35
  • 호수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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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년간 6대 그룹 임직원 교육비 전수조사 결과
삼성·현대차·SK·LG·포스코·롯데 등 모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기존 사업은 성장이 정체되고, 신사업은 생존 주기가 빠르게 단축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경쟁력입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2012년 1월 신년사에서 인재 육성을 통한 기술 확보의 중요성을 환기하며 한 말이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못해 절실한 비전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삼성을 비롯한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해마다 인재 육성 투자를 늘리며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응하고 있다. 기업들이 인재를 키우는 방식도 트렌드 변화에 발맞춰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이다.

시사저널이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SK그룹, LG그룹, 포스코그룹, 롯데그룹 등 국내 6대 기업의 내부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모두가 최근 임직원 교육비를 늘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불황에도 미래 대비를 위한 인재 육성은 결코 놓칠 수 없다는 기업들의 의지가 엿보인다.

ⓒ연합뉴스
1월10일 서울 서초구 삼성리서치를 방문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연구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LG·삼성, 인재 육성에 연간 1800억원 투자

임직원 교육에 가장 많은 돈을 쓴 곳은 LG그룹이었다. LG의 임직원 총 교육비는 2020년 1021억원, 2021년 1323억원, 2022년 1877억원으로 3년 사이 84% 증가했다. 총 교육비를 총 임직원 수로 나눈 1인당 교육비는 56만원, 61만원, 83만원으로 집계됐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2018년 취임 후 인재 육성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3월 서울 강서구 LG사이언스파크에서 열린 ‘LG 테크 콘퍼런스’에 참석해 “LG의 꿈은 사람들의 삶에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고 상상을 더 나은 미래로 만들어 모두가 미소 짓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면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혁신’,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과 인재’가 소중하다”고 밝혔다.

구 회장의 인재 육성 의지 아래 LG는 신입·경력직 입사자 교육, 관리자·임원 리더십 교육 등 기본 프로그램에 더해 시시각각 바뀌는 기술·산업 트렌드에 조응할 수 있는 직무 전문교육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교육 주제는 인공지능(AI), 바이오(Bio), 클린테크(Clean tech), 이른바 ‘ABC’다. 구 회장이 그룹의 신(新)성장동력으로 제시한 분야들이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의 임직원 총 교육비 규모와 최근 3개년 증가율도 LG와 엇비슷했다. 같은 기간 삼성의 교육비는 83% 늘어나 2022년에 1853억원을 기록했다. 다만 1인당 교육비는 157만원으로 LG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아버지 이건희 선대회장의 2주기였던 2022년 10월25일, 이틀 후 예정된 회장 취임에 앞서 계열사 사장단과 오찬을 함께하면서 “미래 기술에 우리의 생존이 달려있고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낸다”고 강조했다. 이후 회장 취임식과 취임사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취임 일성이었다. ‘인재 육성을 통한 기술 확보’는 이건희 선대회장이 내세운 위기 극복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삼성은 입사자 교육, 리더십 교육, 직무 전문교육과 더불어 국내외 경영학 석사(MBA)와 인사·재무 석사 학위 취득, 학술 연수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또 사내 기술대학으로 삼성전자공과대학교(SSIT)를, 기술대학원으로 성균관대 반도체디스플레이공학과와 DMC공학과를 운영하며 임직원 재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2월까지 학사 1076명, 석사 816명, 박사 91명이 SSIT와 사내 기술대학원을 졸업했다.

현대차 임직원 교육비 3년 새 119% ‘껑충’

교육비 증가율만 따지면 현대자동차그룹이 선두를 달렸다. 현대차의 임직원 총 교육비는 2020년 290억원에서 2021년 417억원, 2022년 636억원으로 매해 수직 상승했다. 3년간 증가율은 119%에 이른다. 1인당 교육비 증가율도 105%로 가장 높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그룹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임직원들 사이에 ‘미리 준비하는 문화’가 정착되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미리 준비하는 문화는 신성장제도, 우수 인재 해외 파견, ‘러닝라운지(Learning Lounge·학습 지원 시스템)’와 ‘러닝랩(Learning Lounge·학습 모임)’ 운영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구축돼 가고 있다.

신성장제도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먼저 임직원들이 전동화 체제로의 전환, 소프트웨어 경쟁력 확보, 자율주행, 목적기반차량(PBV),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로보틱스 등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경력 개발과 역량 향상 계획을 수립하면, 이 계획에 따라 상시 학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식 나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의 경우 2022년 자료가 없었는데, 2019~21년 총 교육비는 3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총 교육비는 523억원이다. 1인당 교육비는 2019년과 2020년 똑같이 208만원으로 교착 상태였다가 2021년 213만원으로 상승했다. 포스코는 2020~21년 증가세였던 총 교육비와 1인당 교육비가 2022년 감소세로 돌아섰다. 2022년까지 3개년 데이터를 종합하면 각각 6%, 5%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SK에는 그룹 공통의 역량 강화 플랫폼인 ‘써니(mySUNI)’와 ‘LCL(Learning Collabo Lab·학습 모임)’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포스코는 임직원들의 업무환경 변화에 맞춰 핵심 기술을 전수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포스코는 오프라인 집합교육 71개 과정과 온라인 교육 4046개 과정 등 총 4117개 직군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뒀다.

ⓒ롯데그룹 제공
롯데그룹이 혁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2022년 1월 리뉴얼 오픈한 롯데인재개발원 경기 오산캠퍼스 ⓒ롯데그룹 제공

롯데 “승진시킨 후 교육하려면 늦어”

롯데는 액수를 공개하진 않았으나, 총 교육비와 1인당 교육비가 2020~22년 각각 20%, 18% 늘었다고 전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준비된 인재를 사전에 육성해야지 (관리자나 임원으로) 승진시킨 후에 교육하려면 너무 늦다”는 철학을 사내에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00억원을 투자해 2022년 1월 리뉴얼 오픈한 롯데인재개발원 오산캠퍼스는 올해 들어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롯데의 대표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CEO 후보자 대상 ‘자이언츠(GIANTs·Great Innovators and next top leaders)’와 임원 후보자 대상 ‘하이포(HiPO·High potential)’다. 자이언츠는 계열사 CEO가 될 만한 인재들을 미리 선발해 약 3년간 비즈니스와 글로벌 역량, 리더십 등을 훈련하고 검증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이포는 임원 후보자 100여 명을 모아 실제 임원이 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솔루션을 내놓게 하는 등 프로젝트 수행과 전략 수립에 주안점을 뒀다. 롯데 관계자는 “AI 관련 교육 체계와 직무별 전문성 강화를 위한 인재 육성 체계도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68년 전통의 GE ‘크로톤빌’ 연수원은 왜 매물로 나왔나

바뀐 인재 육성 키워드는 ‘개방’ ‘현장’ ‘온라인’

2022년 말 재계는 미국에서 들려온 소식 하나에 술렁였다. 세계적인 제조업 공룡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임직원 교육시설인 존 F 웰치 리더십 개발센터, 일명 ‘크로톤빌(Crotonville)’ 연수원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미국 뉴욕주 오시닝의 21만3000㎡(6만4000평) 부지에 건물 5개 동으로 이뤄진 크로톤빌 연수원은 1956년 개원 후 GE의 경영 혁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1981년부터 2011년까지 GE를 이끈 전설적인 경영자 잭 웰치 체제에서 위상이 급상승했다. 잭 웰치는 1980~90년대에 엄청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도 크로톤빌 연수원에 대해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한때 크로톤빌 연수원의 연간 예산은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GE가 승승장구하면서 크로톤빌 연수원은 전 세계 기업들의 롤모델이 됐다. 너도나도 GE처럼 대규모 오프라인 공간에 임직원들을 모으고, 내외부에서 섭외한 최고의 강사진에게 교육받게 했다. 각자의 임직원 교육시설을 운영하는 국내 주요 대기업들도 크로톤빌 연수원의 교육 프로그램을 상당 부분 벤치마킹했다. 경영자들이 직접 크로톤빌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2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상무보)이 처음 현지로 날아갔고, 2005년에는 경영자들과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크로톤빌 연수 프로그램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GE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크로톤빌 연수원의 힘도 빠지기 시작했다. GE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 전략의 역풍과 금융 부문 부실로 실적 부진이 심화하자 2017년부터 6년에 걸쳐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결국 GE의 심장처럼 여겨졌던 크로톤빌 연수원도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김성준 국민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는 자신의 SNS를 통해 크로톤빌 연수원이 매물로 나온 사실을 언급하면서 “GE가 휘청이면서 매물로 내놨다지만, (기업의 오프라인) 연수원 모델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라며 “과거에는 소수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고, 이를 가진 사람을 찾아 사내 임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인재원 모델의 핵심이었는데, 세상이 크게 바뀌어 지식과 정보가 차고 넘치게 되자 정보 독점 권력이 상당 부분 와해됐다”고 분석했다.

GE 스스로도 ‘학습이 이제 크로톤빌 연수원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장에 있다’고 선언했다고 김 겸임교수는 전했다. GE 관계자는 “GE의 사업부 분사 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라 예전 같은(크로톤빌 연수원 같은) 임직원 교육 프로그램은 따로 운영하고 있지 않다”면서도 “경영진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의 30%를 인재 발굴과 양성에 쏟는 회사의 방침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요즘 국내 재계에서도 크로톤빌 연수원 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울러 주요 대기업들은 △필요하다면 회사 내부든 외부든 가릴 것 없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톱 다운(top-down)’이나 주입식 교육이 아닌 현장에서 진정 원하는 실질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오프라인 연수원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등 ‘개방’ ‘현장’ ‘온라인’ 키워드로 수렴되고 있다.

LG그룹 관계자는 “입사자 교육이나 리더십 교육 등 기본 프로그램은 경기도 이천의 LG인화원(오프라인 연수원)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지만, 직무 전문교육은 임직원들이 그때그때 각자의 필요에 의해,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 수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온라인 직무 전문교육이 활성화해 완전히 자리 잡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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