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도 조선과 일본의 천민들은 뭉쳤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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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6화 - 백정의 역습
양국서 각각 “천민 신분 철폐” 외친 조선의 ‘형평사’와 일본의 ‘수평사’

일본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야나이 타다시(70) 유니클로 회장이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시골 옷가게를 연매출 20조 원이 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신화적 인물이다. 이 회사 모토인 "옷을 바꾸고, 상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는 그의 성공 비결이자 경영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눈여겨 볼 건 그가 두 아들을 제쳐두고 "회사 DNA를 갖춘 직원을 후계자로 뽑겠다"고 선언한 사실이다. 그의 말은 갑질 논란에다 별다른 노력 없이 기업을 물려받는 국내 재벌들의 그릇된 풍토를 떠올리게 한다. 야나이 회장의 '아름다운 퇴장'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여기에다 그가 일본의 천민계층인 부락민 출신이란 사실도 흥미를 더한다. '부락(部落)'은 백정, 소나 말을 거래하는 우마상, 사형집행자, 시체매장자 등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야나이 회장의 할아버지는 우마상이었고 큰아버지는 부락 해방운동가였다. 그의 집안에는 부락민들이 신분 철폐를 외친 '수평사(水平社)'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이 많다. 야나이 회장이 나이에 상관없는 '평범한' 옷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그의 선조들은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셈이다.

 

3·1운동 후, 조선과 일본을 뒤흔든 '버림받은' 이들의 처절한 외침

수평사는 1922년에 세워졌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조선의 백정들도 이듬해 '형평사(衡平社)'란 단체를 만들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은 여전히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도 봉건적 신분제가 이어져 호적에 백정을 뜻하는 '도한(屠漢)'이라 적혔다. 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결혼이나 취업 등에서 심한 차별에 시달렸다.

일본 메이지대학에 다니던 장지필이란 인물도 조선총독부 취직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가 호적에 '도한'이 찍힌 것을 보고 취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또 경남 진주의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 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부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정의 아들이란 사실이 들통나서 학교에서 쫒겨나기 일쑤였다. 분노에 찬 이들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저울(衡, 형)처럼 공평(平, 평)한 사회를 만들자"라며 '조선 형평사'를 결성했다.

희한하게도 형평사 설립에는 양반들도 동참했다. 그 중 진주의 명문가 출신이자 천석꾼 아들 강상호(1887~1957)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3·1운동 때 옥살이까지 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조선인끼리 차별하는 것은 일제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짓이다"면서 이 운동에 전재산을 쏟아부었다. 아예 백정의 자녀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학교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그는 '양반 백정'이란 조롱을 적잖이 받았을 터다. 강상호는 정작 자기 자식들은 교육을 시키지 못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들이 치렀는데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진주 형평사 기념탑과 독립유공자 강상호. 오른쪽은 형평사 대회 포스터.
진주 형평사 기념탑과 독립유공자 강상호. 오른쪽은 형평사 대회 포스터.

3·1운동으로 촉발된 개혁 열기와 백정 집단 특유의 결속력 덕분에 형평사는 일 년 만에 80개 지회, 7000여 명의 전국 조직으로 몸집을 불렸다. 수백 년 동안 짓눌린 차별과 억압을 떨치고 백정들의 '역습'이 시작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농민·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무렵 신문에 난 '반(反)형평' 폭력 사건만 해도 40건이 넘었다. 특히 1925년 경북 예천에서는 수백 명의 머슴·막일꾼들이 형평사 지회를 습격하고 길 가던 백정들을 구타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을과 을'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분철폐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형평사 지도부는 다른 사회 단체들과 손잡고 연대 활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식민지 백정들이 종주국 일본의 부락민들과도 함께 활동을 벌인 점이다. 이들은 현해탄을 오가며 상호 초청 및 간담회 등 인적 교류를 활발하게 펼쳤다. 1924년 일본 수평사가 형평사 대회에 보낸 축전에는 "정신적 노예를 떨쳐내는 깃발을 높이 들고 함께 진군하자"라고 적혀있다. 두 '불순' 단체가 점차 밀착되자 덩달아 경찰의 감시도 심해졌다. 일제는 수평사의 대표로 위장한 첩자를 형평사 전국대회에 참석시켜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평사 지도자들은 '예천 사태'를 성토하고 항의문을 보내는 등 조선의 '동지'들과 끈끈한 유대감을 이어갔다.

 

"노예 상태 떨쳐내는 깃발 들고 함께 진군하자" 외친 두 나라 천민 '동지'들

수평사를 세운 사카모토, 사이코, 고마이는 나라현의 같은 부락 출신이었다. 세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구열이 남달랐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과학자, 사이코는 화가, 고마이는 변호사의 꿈을 지니고 도쿄 등 대도시의 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실의에 차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론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부락민 해방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고마이 기사쿠 (1897~1945), 이어 사카모토 세이이치로 (1892~1987)와 사이코 만키치(1895~1970). 오른쪽은 수평사 로고와 부락민 모습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고마이 기사쿠 (1897~1945), 사카모토 세이이치로 (1892~1987), 사이코 만키치(1895~1970). 오른쪽은 수평사 로고와 부락민 모습

당시 일본에는 ‘인권 개선’을 내세운 시민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 중 정부와 오사카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대일본평등회’는 일본을 대표하는 ‘민권단체’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중외일보’에서는 “대일본평등회와 달리 수평사는 항상 당국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앞날이 비관적이다”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마침내 1922년 2월 ‘대일본평등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축사가 끝날 무렵 ‘수평사’의 주역 사이코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혼간지 승려의 축사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며 기백 넘치는 연설을 했다.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자 수평사 창립을 알리는 '삐라' 1만 장이 뿌려졌다. 대회장은 부락민들의 선전장이 된 셈이었다. 이 일로 3월 3일 교토에서 열린 수평사 창립식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고, 그 후 수평사는 대표적인 ‘민권단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활개를 치면서 시민운동이 설자리를 잃게 되자 수평사와 형평사 간의 교류도 뜸해졌고, 운동의 성격 또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형평사는 점차 민족주의 성향을 띄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해체됐다. 수평사는 우익 국수주의로 기울었고 전쟁 중 1942년 활동을 중지했다. 맏형 격인 사카모토는 국가주의자로 돌아섰고, 이론가 사이코 또한 천황제를 옹호하는 '황국농민동맹'과 같은 극우단체를 지휘하게 되었다.

수평사 창립 전단, 유니클로 욱일기 디자인과 야나이 회장
수평사 창립 전단, 유니클로 욱일기 디자인과 야나이 회장

이들과 함께 수평사를 창설하고 지부 임원으로 활동한 야나이 덴이치는 유니클로 회장 야나이 타다시의 작은 할아버지다. 그의 큰아버지 마사오 또한 부락해방운동을 펼쳤고 야마구치현 의원을 지낸 '우익' 정치인이었다. 야나이 회장은 마사오가 창업한 오고오리 상사에서 처음 의류 일을 배우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야나이 일가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은 조선 침략을 주장한 정한파(征韓派)와 일본 극우세력의 본거지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총리도 이곳 출신이다. 야나이 일가는 같은 현 출신인 A급 전범 용의자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집안과도 긴밀한 유대를 맺어 왔다.

이렇듯 야나이 회장의 '성공 신화' 뒤에는 일본 우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실제로 그의 회사는 욱일기가 새겨진 티셔츠, 디자인, 광고로 여러차례 구설에 올랐다. 국내 언론에선 그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난한 사실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2005년 12월 27일자 ‘도쿄신문’에 실린 그의 발언을 살펴보면 "중국을 자극해서 일본 경제를 어렵게 하지 말라"는 뜻에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즈음 유니클로는 중국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총리 비난 발언은 '장삿속'으로 한 말이지 군국주의 회귀를 경고한 게 아니란 얘기다.

유니클로의 한국내 매출은 4년 연속 1조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한국민을 자극하는 욱일기 소동은 더이상 되풀이 되어선 안될 일이다. 야나이 회장은 100년 전 자신의 선조들이 조선 백정 '동지'들과 함께 꿈꾸었던 공존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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